여우비가 내리던 어느 날
김호랭@LOH_HORANG
《자유주제》
습기를 머금은 무더운 날이었다. 바람이 상쾌하다기보단 끈적거렸기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어떻게 되먹은 날씨인지. 장갑을 낀 손으로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냈다. 아발론 안은 축제의 분위기로 붕 떠 있었기에 왕궁 안팎으로 기사들은 분주히 몸을 놀렸다. 행정업무를 맡고 있던 나 역시 여간 바쁜 게 아니었다. 일주일 동안 제대로 자본 게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니까. 그래도 이번 나흘, 축제만 지나면 완벽하게 해방이다. 그때는 홍차도 마시고 눈도 좀 붙이고…. 그리고 또….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휴식을 떠올리며 조슈아는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로드. 공연 일정에 관련한……. 로드?”
“조슈아. 살려줘…….”
저야말로 살려주세요. 로드. 루인경이 뒤에서 노려보고 있지 않습니까. 라는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흉흉하게 웃으며 결제가 완료된 서류를 정리하던 그는 조슈아의 서류를 넘겨받곤 찬찬히 보고 있었다. 로드는? 옆에서 다 녹아버린 푸딩이 되어가고 있었다.
참으로 안쓰러운 어린 군주였다.
“루미에 경이라도 불러드릴까요? 로드?”
“그런 무서운 소리는 하지 말아 줘! 아까 집무실 전체를 얼려버린 거 겨우겨우 복구하고 갔다고!”
사색이 된 그가 소리치는 도중 노크 소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풍성한 치마, 짧고 가지런한 머리카락. 일순간 시야가 빼앗겨 버리는 올리브 빛 눈.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이었다. 로드, 일하는 도중에 죄송합니다. 살포시 눈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경을 피해 살짝 옆자리를 내주었다. 일순 아주 짧게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기계적으로 이어지는 아주 가벼운 눈인사.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이 사람 앞에선 늘 긴장이 된다.
“로드, 다름이 아니라. 축제에 필요한 인력이 부족해서요.”
“농담이지…?”
“농담이 아니에요. 로드 지금 전체 전력의 절반 정도만 아발론에 있잖아요. 기사분들 몇몇도 외부로 파견 나가시고. 축제로 들떠있는 기간에 외부세력이 침입할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 전체적으로 외곽 쪽에 경비를 강화하다 보니 축제 내부의 인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요. 민간인들에게 맡기기도….”
“일단 전후 상황은 알겠어. 파견을 조금 미뤄뒀어야 하는데 내 실책이야….”
마른세수하던 로드는 이내 입을 가리고 사색에 잠겼다. 수 초가 지났을까. 검지로 책상을 가볍게 톡 두드리며 바네사를 바라보았다.
“현재 왕궁 내부에 남은 기사들은?”
“....나인, 루미에 경, 바네사 경, 그리고 저…. 정도입니다. 그나마 외곽 쪽에서 제일 가까워서 바로 협력할 수 있는 건 메이링 경 정도고요.”
이어진 대답에 또 정적, 옆에서 익숙한 눈길이 닿았지만, 최대한 무시했다. 아, 뭔가 불안한데, 어째서인가
“자네들에게 미안하지만, 바네사 경, 조슈아 경.”
불안한 예감은
“이틀 동안만 축제 안에서 잠입업무를 해줬으면 해. 정말 미안해.”
틀리지 않는다.
P
애초에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럴 입장도 되지 못했다. 나는 아발론의 기사였고, 한때는 전쟁 포로였으며 조금 더 과거에는 처형자, 제국의 개였던 도구. 짧은 상념을 털어버리려는 듯 훌훌 고개를 저었다. 속에서 오랫동안 묵은 한숨을 내뱉으려는 그때.
“경” 절대 도망칠 수 없는 목소리가 걸음을 멈춰 세웠다. 파락, 하고 한 손에 쥐던 서류 몇 장이 땅에 뒹굴었다.
“....경. 오랜만입니다.”
“아까 집무실에서 만났잖아요?”
바네사가 허리를 숙여 땅에 떨어진 서류를 주워 건넸다. 서류를 줍는 손짓 하나마저 기품이 깃들었다. 멋쩍은 듯 건넨 서류를 받아들고 살짝 한 걸음을 물러섰다. 그런 어설픈 배려를 눈치라도 챈 건지. 그 사람은 아주 강하게 내 손목을 붙들었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마세요. 조슈아 레비턴스”
늘 이렇다. 난 당신의 말 한마디에 모든 삶이 예속된다. 당신이 그러지 말라 했음에도, 그렇게 살지 말라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내 삶은 결국 누군가의 지시로써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인생이었다. 그런 생에 마치 한줄기의 비가 내렸다. 햇살 틈에서 찬찬히 흩뿌려진 여우비가 오랫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던 사람처럼 처음 본 비는 너무나도 달고 시렸기에. 그 비는 타인이 흘린 피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다.
“처형인 이였던 제가 축제에 가면 분위기만 망칠 텐데 로드께선 늘 종잡을 수 없는 분이군요.”
“원체 새로운 발상을 해내시는 분이시죠.” 아, 이게 아닌데 다급히 말을 바꾸었다,
“....경도 저랑 함께하기……. 그, 힘드신 거 아닙니까.”
“지금 가장 힘들어 보이는 건 당신인데 말이에요.”
망했다. 어째 한마디를 이길 수가 없다. 이 사람은 대체 날 곁에 둬서 어찌하려는 셈일까. 몇 달 전 이곳에서도 차츰 적응되었을 때, 그녀와 정식적으로 대면을 했었다. 원탁의 테이블에서 텁텁한 홍차를 들이켜면서 그녀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질문에 아직도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예를 주겠다 했었지. 그녀는 여전히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계속 머물러있었다. 아주 힘들게 입을 열었다.
“이런 말 거북하실지도 모르시겠지만. 아직 아발론의 백성들에게 제 모습을 보이는 건 로드께도 아발론 내부에서도 여러 폐를 끼칠 거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름 진심이었다. 실제로 로드는 특임대 지휘관이었던 적국의 나를 데려오는데 온갖 구설수에 오르락내리락했었고 이는 바네사 왕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국의 왕녀가 로드의 기사가 되어서 그리고 제국의 개를 들였다는 소문은 나라 안팎으로 파다하게 퍼졌다. 다시는 당신에게는 흠을 내고 싶지 않았다. 입방아에 오르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애써 떨리는 입가를 최대한 이로 짓씹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게 당신의 대답인가요?” 왕녀가 올곧게 바라본다.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렇습니다.” 짙은 연둣빛이 무언가를 꿰뚫듯이 응시했다. 그리고 마주 보았다.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에요.” 피하지 못한다.
“애초에 경께서 제게 무슨 답을 원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말할 수밖에 없는 대답이죠.”
인간이라고? 내 삶을 인간의 삶이라 말할 수 있는가? 내가 걸어온 길이 인간이었으면 걷지 않아도 될 길이었을까? 당신의 한마디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나는 과연 인간인가?
아주 짧은 상념을 깨운 건 밖에서 갑작스레 내리는 비였다. 맑은 날에 세차게 오는 비는 깨나 이질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비가 오는군요.”
“여우비네요.” 그녀가 짧게 받아쳤다.
“축제가 엉망이 되겠습니다.”
“금방 지나갈 비니까요. 여우비는 늘 그렇답니다.”
비 따위 상관없다는 듯 그녀는 장갑 낀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 찰나의 한순간에 여우비가 멎어갈 그 짧은 시간에
당신을 바라보며 신이든 그 무엇이든 누군가에게 빌었다.
나는 당신에게 금방 지나갈 존재이길 바란다.
당신의 삶에 지워낼 수 없는 수많은 흔적을 남겼지만
그런데도 부디, 내가 당신의 분노로써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렇게 입 밖으로 차마 응어리진 감정을 뱉지 못하고 그저 서원할 뿐이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