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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남겨진 것은
다야@penno_n

《자유주제》

* 사망 소재 주의

 

 

 

 

 알드 룬의 마지막 왕족이 죽었다.

 

 바네사의 죽음은 아발론에 큰 파문을 불러왔다. 함께 임무를 나갔던 몇몇에게는 큰 죄책감을 심어주었으며 아발론의 기사들은 전투를 치를 적마다 그녀의 부재를 실감했다. 모든 것이 조금씩 변했다. 조슈아 레비턴스는 겉보기에 변함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매일 밤 온몸이 피로 뒤덮여 식어가는 바네사의 꿈을 꿨고, 죽어가는 그녀가 속삭이는 원망의 말을 들으며 용서를 빌었다. 악몽이 멈추지 않았지만, 그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발론의 군주는 바네사가 죽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그녀의 죽음을 수긍하고 그녀의 방을 정리했다. 바네사와 친분이 있어 직접 방 정리를 돕던 올가 파블리첸코가 그녀가 남긴 편지를 발견하곤 아발론의 왕에게 전달했다. 기사는 늘 혹시 모를 죽음에 대비하여 유서를 써두는 것이 보통이니 당연한 일이라지만 바네사의 유서를 본 그들은 다시금 슬픔에 잠겼다.  그녀가 남긴 두 개의 편지의 겉면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수신인이 쓰여있었다. 하나는 아발론의 기사들과 그녀의 주군에게, 나머지 하나는 아발론의 기사가 된 조슈아 레비턴스에게.

 

 몇몇은 편지의 수신인이 조슈아라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왕녀가 그에게 편지를 남긴 이유를 아무도 알 수 없었으며, 그것을 설명할 편지의 주인은 이미 세상을 뜬 참이었다. 그녀가 남기고자 한 말이 있으리라는 왕의 말을 끝으로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자애로운 망국의 왕녀는 그를 용서했을까? 원망의 말을 남겼을까? 모두가 품고 있는 의문이었다.

 그날 밤, 로드의 부름을 받은 조슈아는 바네사의 편지를 전달받았다. 편지를 받아든 그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편지 안에 어떤 원망의 말이 담겨 있을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으며 그는 그 원망을 무시할 자신마저 없었다. 선택지는 하나였다.

 조슈아는 그녀가 자신에게 남긴 편지를 열어보았다.

 

P

 

 [조슈아 레비턴스 경에게.

 경께서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것은 제가 이미 죽었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이 편지를 통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신과 저 사이의 깊은 감정의 골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당신이 알드 룬을 멸한 사실에 관하여 이야기한다면 저 혼자만의 이야기가 되었겠지만, 우리는 나눌 이야기가 더 있으니까요. 혹여 둔감한 당신이 아직도 자신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을 가정하여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사랑이 저를 향함을 알고 있습니다. 감정의 주인은 분명 당신임에도 제가 먼저 알아차린 것부터 모순일 수 있으나 당신도 납득하리라 믿습니다. 아마 당신이 아직까지도 알아채지 못했다면 이제부터 저의 죽음은 당신의 불행이 되겠군요. 저에게는 천운 일지도요. 악독한 발언으로 보일지 몰라도 저는 당신에게 그 어떤 복수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어쩌면 못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같은 분을 모시는 기사로서 어찌 주군께 충성을 바친 그분의 기사를 방해하겠습니까.

 과거 당신의 충성이 제국을 향한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자의로 바친 충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그 사실 하나로 증오를 거두기에 나는 너무도 나약한 사람입니다. 향할 곳 없는 분노는 결국 당신을 향했습니다. 당신보다 제국을 원망하는 마음이 더 크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향한 증오를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 저의 잘못도 일부 있지만 사과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신이 죽은 저를 저주할 리는 없다고 믿으니까요.

 

 지금부터는 앞의 원망을 제외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당신의 마음을 알아챈 것이 언제쯤인지 궁금한가요? 안타깝지만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저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기도 어려운데 남의 마음을 알아채는 데 짧은 시간이 걸렸을 리 있나요.

 

 하지만 확신을 얻은 순간은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과 나, 단둘이 임무를 나갔던 날을 기억하나요? 단 한 번이니 기억하리라 믿습니다. 쌓이고 쌓이던 의심이 터질 무렵이었습니다. 당신은 여느 때와 같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들고 있던 짐이 꽤나 가벼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 손으로 손쉽게 들 정도였으니까요. 당신은 제 손에 들려있는 가방을 가져가며 들어주겠다고 말했죠. 그때 당신이 댔던 이유를 정확히 기억합니다. 힘들어 보인다, 다시 생각하니 재미있군요.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저는 전혀 힘들지 않았고, 당신은 그 짐을 손으로 직접 들었습니다. 다른 이가 했다면 예의로 느껴졌겠지만 당신이 조금이라도 번거로운 일이라면 마다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모를 리가요. 부정하고 싶지만 저는 당신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답니다.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트집을 잡고  싶은 마음에 당신을 관찰하다 보니 저는 당신의 사소한 습관 하나까지 기억하게 됐습니다. 저는 이 세상의 누구보다 당신에 대해 잘 알고있으리라 감히 확신합니다.

 

 당신은 서류를 처리하다 싫증이 날 때면 서류의 끝을 구기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루인 경께 매일같이 혼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펜을 잡는 모양이 보편적이지 않은 것도 기억합니다. 당신은 늘 엄지가 검지보다 아래에 오도록 펜을 잡고는 조금만 글을 끄적여도 손이 아프다며 중얼거리곤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가진 관심을 깨달은 날, 저는 조금 울고 싶어졌습니다. 이 감정이 동정을 빙자한 애정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요. 정확히는 애증일까요? 저는 그날이 오기 전까지 애증은 소설 속에나 존재하는 감정인 줄로 알았습니다.

 사담이 길어졌군요. 제가 당신께 남기는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이니 이해해주리라 믿습니다. 편지를 마무리 지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남기고자 한 말은 이것입니다. 저는 당신을 용서했습니다. 알드 룬의 마지막 왕족으로서가 아닌, 제 지위와 성을 제외한 그저 바네사라는 한 사람으로서 당신을 용서했습니다.

 이 용서로 당신이 괴로워할지, 조금의 평화를 얻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랬습니다. 더는 증오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제가 죽지 않는 이상 당신께 말하지 않을 생각이지만요.

 제 지저분한 속내를 밝혀보자면, 저는 그대가 괴로워하길 바랍니다. 몇 년이고 나를 떠올리며 악몽을 꾸고, 나를 그리며 밤을 지새우길 바랍니다. 그것으로 알드 룬의 왕족으로서의 복수를 마치고 조국의 원수를 용서했다는 죄책감을 덜고 싶습니다. 부디 이 편지를 읽은 당신이 내 용서와 죽음을 부정하지 않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

 

P

 

 조슈아 레비턴스는 울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평소의 자신이라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왕녀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닐까? 그는 거듭해서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사랑은 갑작스레 찾아오지 않는다. 그를 깨닫는 것이 갑작스러울 뿐이다. 조슈아는 더 이상 부정힐 수 없었다.

 

 조슈아 레비턴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잃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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