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해석
뎅(Deng)@0709X0828

《장마》

 

 

 

 

 바네사는 비 오는 날이면 언제나 하늘을 바라본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말이 있다면 누군가를 대신해 하늘이 울고 있다는 한 문장이었다. 그 말은 어떤 이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었을지도 모르고, 울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습게도 바네사는 그 말을 내뱉을 성격이언정 믿는 사람은 아니었다. 저 비가 아무리 쏟아진다 해도 제 눈물이 될 수 없고, 제 슬픔이 될 수 없다. 떠나간 이는 돌아오지 않고, 남은 이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토록 뻔한 말이 제 상황이 되었을 때 저는 그 말을 떠올렸던가, 저주했는가. 괴로웠다. 괴로웠고, 슬펐고, 나아가는 길마저 무거웠다. 왕녀라는 무게는 가족들 앞에 처음으로 연주회를 선보였던 어린 날의 떨림과 달랐다. 무겁다고 악기를 내려놓을 수 없고, 물집 잡힌 손을 보며 어리광 부릴 수도 없었고, 무대가 끝나 오라버니에게 달려가 안길 수도 없었다. 이제 그 시절에 비교하자면 너무 많은 게 달라졌다. 그나마 왕녀라는 직책으로 제 믿음에 따라주는 이들을 이끈 건 바네사란 사람이 그만한 능력이 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칭찬을 듣기 위한 일이 아니다.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이란 사람은, 고통에 빠져 스스로를 놓아버리지도 않았고 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자애로운 사람이었다.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이해하고 싶고, 공감하고 싶은… 할 수 있다면, 타인의 죽음을 가볍게 여겼던 이들도 어떤 심정이었을지 이해하고 싶었다. 하루가 지날수록 이해와 멀어졌지만 덕분에 알아낸 건 있었다. 이미 지난 날들을 붙잡아 떠올리는 건 행복을 느낀만큼 괴로움을 느껴도, 당신이란 존재는 제게 있어 괴로움이 아니었다.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를 향하던 바네사의 시선은 저 멀리서 걸어오는 분홍빛 머리를 향해 그대로 내렸으나 이미 저를 발견하고 시선을 피하는 이가 있었다.

 

 ‘ 고작 시선 하나 피한다고… ’

 

 이미 마주한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데. 그가 자신의 가족을 살해했던 그날로 돌아갈 수 없던 것처럼 모든 시간은 마주한 순간 우리에게 있어 현실로 남을 뿐이었다. 바네사는 조슈아를 보면 하고 싶은 말을 내뱉지 않고 생각으로 그쳤다. 그는 자신에게 있어 괴로움은 아니다. 용서한 게 아니고, 불쌍히 여기는 게 아니며, 새로운 감정이 싹트는 게 아니다. 세상은 불공평하게도 조슈아 레비턴스에게 기회를 준 듯 싶었다. 어쩌면 저를 시험에 빠트려 왕녀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고민할 시간을 준 걸지도 몰랐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아발론에 온 이후 정말 했던 고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네사는 결코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바네사에게 있어 조슈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호의였다.

 

 “ …이리 오세요. ”

 

 시선은 여전히 그에게 머물러 한마디를 말하였다. 제게 오라는 말은, 도망가지 말라는 말과 같아 바네사가 조슈아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었다. 이리 오세요, 도망가지 마세요, 저를 마주하세요, 제가 당신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처럼. 이렇게 말하면 조슈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였지만 곧이곧대로 바네사의 곁에 서있었다. 그가 왕녀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는 게 죄책감 때문인지, 순수한 호의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후자는 아니겠지만. 창가 근처에 선 두 사람은 한참동안 말 없이 내리는 비를 보고 있었다. 바네사는 익숙하게 하늘을, 조슈아는 바네사를 바라볼 수 없어 내리는 비를. 비는 분명 누군가의 눈물도 슬픔도 될 수 없다. 이는 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 …넌 장마랑 어울리지 않아. ”

 

 아발론의 로드가 봤다면 불안하다며 발걸음 하나 떼지 못했을 침묵 속에서 조슈아는 툭, 말을 내뱉었다. 그 말에 바네사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자 중얼거리며 혼자 한 말인지 시선에 놀라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면 바네사도 모르는 척 넘어갈 생각이었다. 의미는 궁금하나 햇살이 어울린다는 말은 종종 들어왔던 말이었다. 그도 비슷한 의미로 한 말이겠지. 다만, 눈에 띄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면 괜히 묻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지금 와서 제게 잘 보이려고 입에 발린 말을 할 사람은 아니다. 자연스런 미소를 짓고 있던 평소와 다르게 입꼬리를 내렸다. 이는 일부러 딱딱한 표정을 짓는게 아니며, 어떠한 상황 속에도 그를 향해 웃을 수가 없었다.

 

 “ 그 말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

 

 목소리 또한 단조로웠다. 바네사는 그에게 어떠한 호감도 갖지 않으며 이건 오로지 궁금증을 풀기 위한 질문이라며 감정을 담지 않고 말할 뿐이었다. 자신을 제외하고 웃음을 짓던 이에게서 받는 냉정함은 조슈아도 마냥 좋은 기분은 아니었으나 이에 대해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대우는 현명한 선택이다. 냉정하다거나 좀 더 웃어달라거나 용서를 구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가끔, 아발론에 온 이후 바네사를 마주한 순간에만 느끼는 감정은 제 심장을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뛰게 만들었다. 답답하다. 무겁고, 괴롭고, 도망가고싶다. 그러나 지금 마주한 순간 내뱉은 말에 답을 해야만 한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영원히 피할 수 없듯이.

 

 “ 넌 흘러갈 존재가 아니니까 하는 말이야. ”

 “ 누구에게 있어서요? ”

 “ …누구에게든. ”

 “ 누구, 라는 말에 당신도 포함되어있는지 묻는 겁니다. ”

 “ … … ”

 

 아, 또 그 시선이다. 피하지 말라며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대답을 요구한다. 그것도 하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앞에서. 살아온 세월에 스스로의 의지를 담아 움직인 건 이제 기억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 말은 곧 세뇌당했던 기억만 남아 자아가 존재하긴 하는지 스스로도 의문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런 저에게 있어 당신은 다시 찾은 자아를 잃지 말라며 이야기한다. 나는 아직도 찾지 못하였는데, 당신은 저의 어떤 모습을 보고 말하는가? 되돌아온 질문에 어떠한 답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말한다면 그녀에게 무언가 바라는 꼴이며,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건 바라는 게 있으니까. 바라는 걸 내보일 수 없을 뿐이니까. 그렇다면 어떡할 건데? 나에게도 흘러가는 존재가 아니라면 너는… 내게 머물 수 있는가? 답은 정해져 있다.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러니 저 또한 답하지 않는다. 뻔히 보이는 괴로움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사람이 아니다.

 

P

 

 “ 루인, 두 사람이 같이 있어도 괜찮다 생각해? ”

 “ 글쎄요, 그래도 바네사 경이니 문제는 없으리라 봅니다. ”

 “ 바네사는 나도 믿지만… ”

 “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슈아 경도 이겨내야 할 부분이라 봅니다. ”

 “ 흠… 그래. 그나저나 비가 영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

 “ 장마로 피해를 입은 지역을 살펴보겠습니다. ”

 “ …고마워, 루인. ”

 

 짧은 말을 끝으로 로드는 의자에 기대 고개를 돌렸다. 그치지 않은 비 때문에 밖에 나가지 못한 영웅들이 성 안에서 얼굴을 자주 부딪히는 건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친밀감을 쌓는다면 그들의 로드인 입장에서 반가울 이야기이기도 했으나 모든 영웅들이 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다. 바네사와 조슈아, 그들을 사이가 좋지 않다 말해도 되긴 한 건지. 나름대로 미운 티를 내는 모양이나 천성은 어쩔 수 없다고 오히려 미워하지 못해 고생일까, 어쩌면 조슈아를 데려온 일부터 잘못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마땅히 한 국가의 로드라면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위해 올바른 선택을 내려야만 한다. 하지만 저라고 완벽한 결과를 낼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서로 평생 마주할 수 없게 하는 방식도, 억지로 친하게 지내게 하는 방식도 전혀 맘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정말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로드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모두가 성 안에 남아 서로를 피할 수 없는 이상 그들 사이에 큰 사건은 없길 바랄 뿐이었다.

 

P

 

 그래, 뻔히 보이는 괴로움에 자신을 던질 이유가 없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지칠대로 지친 몸과 정신은 더 이상 스스로가 괴롭지 말라며 지금 당장 눈 앞에 놓인 일들도 관둔 채 집으로 가 침대에서 잠이나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든 감각과 생각이 그 말만은 하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중에 딱 하나 벗어나는 감정이 그의 입을 열게 한다. 어차피 거짓을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자신이 뱉은 말에 무엇이 진실인지 알아차리는 그녀를 보면 단순히 감탄뿐만 아니라 압도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 …당연히. ”

 

 당연히, 나도. 나도 속해있어. 소리를 낸 단어는 세글자였으나 제 맘 속 깊은 곳에서 간절함을 표현한다. 용서를 바라거나 호감을 얻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야. 나는 정말로 네가 내게 있어 흘러지나갈 사람으로, 단순히 내가 극복해야하는 사람으로 남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다르기에 끌리는 걸 누군가 사랑이라 표현한다지. 나는 네가 내게 도구가 아닌 인간을 요구했을 때부터 이미 사랑에 빠진 것과 다름없었다. 아발론에 오기 전, 몇 번이고 네 말을 되씹었는가. 하지만 너는 나를 용서하지 않을테고, 이는 내게 있어 가장 끔찍한 벌로 남게 되겠지. 두 사람 사이에 한참동안 빗소리만이 들리고, 어떠한 답도 없이 여전히 자신을 바라본다. 피하지 않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건 핑계인 것도 알고 있다. 저는… 비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조슈아의 온 신경이 바네사를 향한다. 그 목소리에 닿고 싶어 움직인 시선이 입술을 읽는다. 귀에 도달한 글자와, 자신이 읽은 입술, 인식된 문장이 현실인 걸 알고 싶어서. 제 삶에 이리 집중한 적이 있던가?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이 지나고 뚝, 뚝 줄어드는 빗방울에 바네사는 걸음을 옮긴다.

 

 “ …먼저 가볼게요. ”

 

 먼저 간 걸음이 한 없이 멀어질 때쯤 장마가 지나가고 햇빛이 든다. 그 사이에 들어오는 빛을 받는다. 그 사이에 들어온 말을 떠올린다.

 

 ‘ 저는… 당신이 절 본다는 걸 알고 있어요. ’

title투명.png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