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의 음률
무언@Mu__UhN
《꿈》
아침을 울리는 알람이 울리기까진 시간이 많이 남았다. 창문을 살짝 열어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자, 코끝이 찡해졌다. 그런데도 깊게 들이마시길 포기할 수 없었다. 내 안이 차갑게 식어갔다.
매번 얕은 잠만 잤던 내가 어쩐 일인지 오늘은 꿈을 꾼다. 알드 룬의 왕녀가 내 앞에 있다. 왕녀는 웃고 있다. 나와 마주하고 있는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모습이 어색하다. 아니, 이 생각은 분명 오만이다. 왕녀가 내 꿈에 등장한 이상, 나에게는 통제권이 없다.
"조슈아 경."
왕녀가 부드럽게 웃어 보인다. 동시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최악의 꿈이다. 몸뚱아리는 답지 않게 숙면을 취하고 있고, 나는 슬슬 이 상황에 녹아들고 있다. 자연스럽게 욕구라는 것이 생겨 더러운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
"왜 그러시나요? 안색이 안 좋으세요."
"가까이 오지 마."
"조슈아 경."
꽉 쥔 주먹 전체에 따뜻한 온기가 퍼진다. 고개를 푹 숙여도 왕녀의 천진난만한 시선을 피할 순 없다. 심장 박동이 거세지는 것에 비례해, 박탈감 또한 커진다. 결국 이 곳의 모든 것이 내 의식의 반영이라는 것을 나 또한 모르지 않았다. 온 몸에 힘이 빠진다.
"바네사."
"네, 말씀하세요."
"나는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내 멍청한 질문에도 왕녀는 싱그러운 미소를 유지한다. 날 꼭 잡은 손도 놓지 않는다. 그것이 오히려,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자각하게 해준다.
"당신은 사랑하고 있어요. 아주 많이, 감히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지?"
"……."
왕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무정한 한숨을 쉴 뿐이다. 왕녀와 나 사이에 선명한 선이 한 줄 그어진다. 고요함이 계속된다.
"역겹게도,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너무나도 놀라 고개를 확 쳐들고, 비로소 왕녀의 허망한 눈을 확인하고 나서야 잠에서 깼다.
그 꿈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왕녀의 눈에서 어떤 감정도 읽지 못 했다. 내 꿈에서의 왕녀라면, 그녀도 날 사랑했을 테다. 나와 같은 크기의 애정은 아니었더라도 그 마음을 감출 수 있을 만큼은 아닐 테다. 나는 나의 무의식에서마저 솔직해질 수 없는 것인가? 죄책이 날 지옥으로 실어 가도 저항할 수 없는 것인가? 잠깐, 나도 모르게 왕녀의 마음을 내가 가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자만심에 잠식당하는 기분이다.
P
"조슈아 경."
또 만났다. 이번에도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다. 지난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손에 바이올린과 활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 바이올린을 가까이서 보는 것도 이젠 익숙하겠군요."
"……."
바이올린을 멀리서만 봤을 때는 참 거슬리는 물건이라고 생각했었다. 왕녀의 음률이 구슬피 울려 퍼질 때마다, 누군가는 구원을 받고 일어섰다. 그 시절엔 상상도 못 했다. 그들의 희망을 산산조각 낸 내가 그것에 구원 받을 것이라고는.
"내게는 꿈이 있어요. 좋아하는 사람들만을 모아놓고 작은 연주회를 열고 싶은 게 그 꿈이에요. 모두 내 음악에 집중해주겠죠. 난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무척 행복할 텐데."
괴롭다. 왕녀는 내 앞에서 행복해지고 싶다 말한다. 왕녀는 미래를 꿈꾼다. 제 과거를 짓밟았던 나를 앞에 두고 희망을 논한다.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왕녀가 음악회에서 어떤 음악을 연주할지, 연주 중 어떤 표정을 지을지, 음악회가 끝나면 어떤 감상을 말할지.
"조슈아 경, 들어주었으면 해요."
"무엇을?"
"제 연주를요. 연습 많이 했으니 들어줄 만 할 거예요."
"뭐, 아니, 뭐라고?"
당혹감을 감출 수 없는 나의 손사래에도 개의치 않고 왕녀가 활을 들어 올린다. 왕녀는 연주를 하려 한다. 나는 순식간에 이 공간의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왕녀는 바이올린으로 청명함을 묘사해낸다. 음률의 정서는 감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왕녀는 무엇을 생각하며 연주하고 있을까? 왕녀에게 감화된 내 본심이 본능적으로 왕녀의 속마음을 궁금해 한다. 왕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조슈아 경. 어떠셨나요?"
"……완벽했다."
"그랬나요? 기쁘네요."
왕녀는 바이올린을 제 발밑에 내려놓는다. 빈손이 치맛자락을 붙잡는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나는 이 분위기에서 오히려 안정을 느낀다. 왕녀는 내게 관심이 없고, 나는 그런 왕녀를 맘껏 바라볼 수 있다. 기괴한 불균형이 오히려 편안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
"무엇인가요?"
"…….당신에게 할 말은 아니야."
왕녀는 당최 말뜻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한다.
"당신은 내가 만들어 낸, 나를 사랑하는 척 하는 자아일 뿐이지. 꿈속에서만 존재해. 현실의 왕녀는 절대 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
비수가 되어 올곧게 날아오는 왕녀의 시선이 내 두 눈을 찌른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 한 눈이다. 그리고……. 이것 또한 내가 간절히 바라는 환상이겠지만, 나의 말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입술을 꼼질거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반론을 제기할 것 같다.
"양심도 없지, 진정으로 현실의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해주길 바라나요? 당신과 같다고 말해주길 바라요?"
"그게 나의 본심이다."
"죽어도 그럴 수는 없어요.“
나의 얼굴이 의문으로 일그러진다. 왕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발언을 철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증오를 차감해주지도 않는다. 대체 무엇이지? 내 앞에 서 있는 왕녀는, 왜 솔직한 나의 욕구를 토대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지?
"답은 간단해요."
슬슬 꿈에서 깰 시간이다. 아득히 멀리서 맑은 새 소리가 들린다.
"당신은 제가 아니라 당신의 죄책을 사랑하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