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
미니키치
《장마》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침대에 파묻혀 잠들어 있던 이의 눈썹 사이가 좁혀졌다. 일어나기 싫은지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그 소리 사이를 지나쳤으나 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작은 새가 문을 열어달라 속삭이는 소리나, 바람이 잠시 쉬었다 가는 소리와 비슷하나 다른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몇 번이고 더 들리고 나서야 바네사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어지는 짧은 한숨. 제 볼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
비가 온다고 늘어지면 안 된다고 자신을 다독이며 바네사는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무거운 듯하자 곧바로 차가운 물에 얼굴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으며 자신의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바네사는 아까까지 늘어지던 기분을 지워내고서야 웃는 얼굴로 창을 바라볼 수 있었다. 비록 창밖에선 여전히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쏟아졌지만 말이다.
"....."
비가 조금 온다면 창문을 열어 손이라도 뻗어봤겠으나 안타깝게도 비는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미 일주일째 오고 있는 비였으니 말이다. 장마. 여름이니 벌써 그럴 때가 되긴 하였단 생각을 하며 그는 전날 밤 챙겨둔 가방을 챙겨들었다. 알드 룬은 괜찮을까, 수해가 생길 부분은 미리 말을 해 두었으니 이번엔 피해가 적겠지? 바네사는 생각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의 성이었다면 나오자마자 올가 경이나 메이링 경을 마주쳤을지도 모르나 복도는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다. 조용함이 묵직하게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으나 고개를 내저었다. 이는 시작되버린 장마 때문에 모두 아침 일찍 각지로 파견을 나갔기 때문이리라. 바네사 역시 조금 늦어지긴 했으나 같은 이유로 방을 나선 것이었다. 그러니 처질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도 빨리 이동을 해야 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신의 바이올린과는 다른 음악 소리가 창가를 두드렸다. 가늘었다가 두꺼워지고. 반복적이었다가 불규칙성을 띄기까지 하는 음악은 얼핏 들으면 즐겁단 생각이 들었다. 음울한 풍경과는 상반되게도. 빗소리란 으레 그렇지 않나. 집 안에서 들을 때와 바깥에서 들을 때 다른 감정과 생각을 들게 하는 대표적인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곳에 들리는 것이라곤 그녀의 발소리, 창가의 빗소리. 그리고.... 바네사는 그 복도를 중간까지 지나쳤을 쯤 걸음을 멈췄다. 짤막한 한숨 소리가 바네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며 답지 않게 딱딱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나오세요."
뚜벅이는 발소리에 몸을 돌리자 보이는 것은 익숙한 사내였다. 그녀보다 조금 더 크고, 그녀와 사내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누구냐 묻는 이들에게 사람들은 많은 수식어를 붙였지만 결국 결론으론 무기력해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이었다. 기껏 비밀 면담을 하며 고민의 고민 끝에 길을 열어 그녀와 같은 기사가 될 수 있게 만들었음에도. 면담이 의미 없게 만들 생각이라면 아주 옳은 선택이겠으나...
그녀는 잠시 자신의 생각을 접고 그와 눈을 마주치려 애썼다. 마주하기 싫은 눈동자이나 사람으로서 대하기 위해서라도 이것은 필수적인 절차였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
질문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바네사는 두통이 느껴지는 제 이마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슈아 레비턴스는 한 발짝 떨어진 거리에 서서 옆으로 옮겼던 시선을 어느새 돌려 자신의 보고 있었다. 둘 사이에 계속해서 침묵이 감돌았고, 결국 바네사는 대답을 듣는 걸 포기하고 다시 몸을 돌렸다. 이렇게 지적한 이상 오늘은 더 쫓아오지 않을 것이기에. 예상대로 그녀가 몸을 돌리자 걸음을 옮기는 발소리가 들렸다. 바네사는 그 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듣다가 거의 들리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걸음을 옮겼다.
툭-.
그리고 걸음을 옮기는 순간 귀를 간질이는 소리에 바닥을 내려다봤다. 하얀색 작은 원형 통이 바닥을 굴러 바네사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아 들어 올려보니 그것은 엄지 손가락만 한 크기의 약통이었다. 약통 안의 약을 살펴보던 바네사는 미간을 좁혔다가 손등으로 제 볼을, 이마를 만졌다.
...열이 있나?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늘어졌었지. 아니, 어제도 식사량이 적었다. 장마 때문에 고향이 생각나 입맛이 없는 것이라 여겼는데. 로드나 다른 기사들이 괜찮냐고 묻기도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제야 그가 왜 자신을 따라왔는지 안 바네사는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웃음이었으나 어이없음이 묻어났고, 표정을 보는 순간 기분 나쁘다는 감정이 섞여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대체, 왜."
바네사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차라리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낸다면 면담을 아주 의미 없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경멸하기라도 할 텐데 그는 로드가 시키면 한숨을 내쉬어도 자신의 일을 다 하긴 다 하였다. 월급받은 만큼의 일은 말이다. 그 외에 하는 일이 없이 누워있거나 자러 가다 보니 여러 수식어가 붙었고 바네사 역시 그런 부분때문에 그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이라고 칭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럴 것이라면 더더욱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이지. 그는 자신을 이유 없이 한참 쳐다보고 있거나, 쫓아오곤 했다. 스토킹,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는 그다지 숨어서 쫓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관찰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일부러 작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자신이 보이면 마치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이끌린 듯이.
그 시선에 성욕, 호기심, 불만감. 차라리 그런 것이라도 담겼다면 더럽다거나 역겹다 말이라도 하였을 텐데 그는 늘 그저 바라만 봤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 텐데. 그 아무것도 모르겠단 표정이. 자신이 무얼 위해 따라오는지 모른다는 표정이. 그것을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지 못해 바네사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주제에 이렇게 나도 모르는 것까지 당신이 챙긴다니.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은 약병을 바닥에 다시 내려놓고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서부터 가벼운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기분 나쁜 감각이 그녀의 목 언저리에 감돌았다. 이 기분 기분 나쁜 안개가 제 목을 조르는 것 같은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최근 그와 있으면 이런 일의 연속이었다. 얼마 전 식사 중 떨어트릴 뻔한 포크를 그가 염력으로 대신 잡아줬을 때라던가, 잠시 한 눈 판 사이 날아가던 모자를 잡아주었을 때라던가. ...처음은 언제였더라. 로드가 조슈아 경 영입 문제로 비밀리에 진행하던 마지막 면담 때였던가.
'그가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이곳이 필요해요.'
바네사는 그가 기사가 되는 것은 반대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보기 힘들고, 증오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단순한. 아주 단순한 이유.
스스로 계속해서 도구로 살아가길 원했던 사람. 생각을 하라 말했더니 그 미래가 어떨지 생각했기에 도망가 버린 사람. 도구로 살아가고 싶단 선택을 해버리고만 그 사람. 그를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내가 하는 말이 그에게 얼마나 영향력이 있을지도 알 수 없었고. 그렇기에 그가 기사가 되길 바랐다.
당신은 애초에 온전한 도구도 아니었니 분명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때문에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로드의 의견을 존중 조건을 붙이고 모든 것을 마무리를 지었었다. 그런데 그렇게 마무리를 짓고 가던 날. 처음으로 그가 쫓아왔었다. 문을 나선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쫓아오던 그의 모습에 바네사는 처음엔 당황했다. 결국 로드의 기사로 함께하기로 했다지만 이렇게 낯짝 뻔뻔하게 쫓아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용무가 있으신가요?"
"...아니."
그런 주제에 몸을 돌려 물어보니 그는 고갤 내젓기만 할 뿐이었다. 어째서 쫓아오냐고 물었으나 그는 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갔을 뿐. 주머니에 사탕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저녁에 옷을 갈아입을 때가 되어서였다. 사탕을 주머니에 넣은 적은 없었으니 그가 넣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래, 이 지독한 감각. 개미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이 감각. 바네사는 그때 처음으로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장마로 눅눅해지고 습해진 끈적거림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 같단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일이 한 번, 또 한 번. 그에게 이런 일이 좋냐고 가서 따져 물을까 하다가 관둔 것은 그와 말을 섞는 게 좋을 리 없단 생각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그리 행동해도 괜찮다 여긴 것인지 걸으면 따라 걷고 멈추면 멈추고. 오지 말라고 하면 또 멍청하게 서서 내가 떠나가는 것을 보는 것의 반복. 찰박, 물소리가 들려와 걸음을 멈춰세우고 하늘을 바라본다. 밖으로 나가려면 우산을 펴야 했다. 우산을 어디에 뒀더라.... 고민하다가 가방 한쪽에 걸린 우산이 보여왔다. 내가 걸어둔 것이 아닌데... 그리 떠올리던 바네사는 그 우산을 준 이가 누군지 깨닫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가, 어서!'
우산을 내려두고 가방을 열어 뒤적이려던 손이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
그는. 모르는 것일까. 이렇게 행동해봤자 자신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을. 그가 자신에게 무엇을 보았든. 내가 바네사이고 그가 조슈아인 이상.
"어머니, 아버지....... 오라.. 버니..."
바네사는 알고 있다. 세상 모두에게 조슈아 레비턴스가 악당이 아니라 하는 세상이 올지라도 자신에겐 끝까지 악당이고 악역일 것임을. 조슈아만의 잘못이 아니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세뇌를 시킨 이가 있었고, 태어나서 지금껏 제국을 위해 살아온이니까. 한순간에 바뀌지 못하겠지. 그렇게 만들라 시킨 이가 있었음 역시 알고 있으나. 그 명을 받들고 가져와 자신의 '가족'을 죽이는 것이 빠른 선택이라 여긴 것은 조슈아 레비턴스 그였다. 그렇기에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은 체자렛도, 카르티스도. 조슈아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용서할 수 없었다. 그의 사정을 이해한다고 해서 용서까지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는 그를 용서할 자신이 없었다.
"...윽.."
분명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날 처형대에 올라가던 나의 가족. 나의 오라버니를 봤던 내가 너를 어떻게 용서할까. 처형대 위에서 마주친 눈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매일 밤, 나를 괴롭히는 것은 누군가를 저주하는 목소리도. 네가 나와 마주 서던 순간도 아니었다.
'살아, 바네사.'
그 목소리가. 다정하기 그지없는 그 목소리가 나를 괴롭힌다. 안도하던 눈. 웃음, 미소. 이것이 왕가이기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받아들이던. 그 모습을 본 나이기에 너를 용서할 수 없다. 나의 몇 날 며칠의 눈물 따위를 그리 쉽게 용서할 수 있을리가.
"...이봐."
돌아갔다고 생각했던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 쫓아와 다가오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습한 기운이 그녀를 옭아맸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끌어안기라도 하는 듯이.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듯했다.
"왕녀."
"....다가, 오지마세요. 괜찮으니까."
빗소리가 들려왔다. 차갑고, 끈적이는 기분 나쁜 감각.
그래.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당신이 기사가 되길 원했던 것조차 나의 생각. 나의 원망을 받기 가장 좋은 위치에 서길 바라서였다. 그렇다고 그게 다가오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당신이 오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일까. 이 정도가 되었다면 차라리 따져 묻는 것이 빠를 텐데. 사탕을 주었을 때, 포크를 잡아 줬을 때. 따라오는 너를 어쩌다 한 번씩 쳐다보는 것은.
발소리가 들리지 않음에도 네가 있음을 확신하게 된 것은.
빗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이 반짝이고 용 울음 같은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며 우리를 바라본다.
....장마.
그래. 이 모든 것은 장마 때문이다. 장마 때문이어야만 한다. 타인의 숨에 내가 가라앉을지언정 이 감각만은 온전히 장마 때문이어야 한다.
"저는 괜찮으니, 돌아가세요. 조슈아 경."
이 감정이, 이 기분이. 너 때문이라면. 내가 네게 느끼는 이 감정이 사랑, 그 단어와 일말이라도 관련이 있노라면.
...이 혐오를 견딜 자신이 없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