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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 연주회
샤베른@ertsdfg38

《장마》

 

 

 

 

 비가 오는 날이면 으레 기분이 가라앉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그 우울함에 침잠되고, 또 어떤 사람은 억지로나마 털어내려고 애쓴다.

 

 무너진 왕가의 마지막 후예인 바네사는 후자에 속했던 사람이다.

 한창 해방군을 이끌던 시기, 그는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현할 수 없었다. 잠시라도 마주하는 순간, 바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기에. 알드 룬의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나약한 모습을 내보일 수 없었다. 그런 위치였다. 때문에 제국군이 완전히 물러가던 날, 그제야 쏟아낼 수 있었던 눈물이 유난히 서러웠더랬다. 이 지난한 싸움이 끝났음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한편, 부러 깊이 묻어뒀던 가족의 잔흔이, 바네사를 괴롭게 했다.

 

 ‘살아라, 바네사.’

 

 가망 없는 전투를 앞뒀을 때 오라비는 동생한테 그리 유언을 남겼다. 바네사를 제외한 알드 룬의 왕족들은 처형대로 올라갔고, 단숨에 그 목숨들이 스러졌다. 바네사는 가족의 최후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들의 마지막을 보았다. 그 중 한 명이,

 

 투두둑—.

 

 창문을 요란스레 두드리는 빗줄기가 바네사의 상념을 깨뜨렸다. 바네사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오늘부터 장마가 시작된다고, 왕성의 시종이 지나가듯 말했던 게 언뜻 기억났다.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던 바네사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에 얌전히 놓인 바이올린이 조명 빛을 머금고 희미하게 반짝였다.

 

 파견 임무를 마치고 아발론으로 귀환한 조슈아는 곧장 보고서부터 제출했다. 그러면 그 길로 즉시 퇴근할 수 있었다. 이번 파견 지역은 꽤나 멀었던 데다가, 프라우와 동행하는 바람에 여러모로 기가 쭉 닳아버린 상태였다. 옆에서 시끄럽게 구는 프라우를 견디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오로지 그만의 고충이었다. 설상가상 비 때문에 공기가 습하다 못해 불쾌하기까지 했다. 이런 날은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안락한 방에 들어가 따뜻한 홍차를 마시며 쉬는 게 제일이었다.

 행정실에서 숙소로 가는 도중에는 외부 통로를 하나 지나게 된다. 즉 빗방울 내지는 비바람을 사방에서 얻어맞기 딱 좋았다. 그렇다고 우산을 쓰기에는 지붕이 달린 구조라서, 최선책은 가능한 빨리 통과하는 것이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문을 열고 막 첫 발을 내딛었을 때, 조슈아는 빗소리 사이로 섞여드는 어떤 소리를 들었다. 너무나 익숙하고, 번번이 그의 가슴을 죄악감으로 옥죄이게 하는, 바이올린 음이었다.

 

 이 왕성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할 이는 얼마 없었다. 하물며 지금 이 연주의 주인은, 조슈아가 감히 똑바로 마주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그는 빗속으로 몸을 들이밀고야 말았다. 마치 홀린 듯, 그 끝이 절벽임을 앎에도 발을 움직이는 사람 같이.

 

 비에 물든 연주자가 그곳에 있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그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온화한 선율이 빗소리와 어우러지며 몽환적인 화음을 자아냈다. 그는, 바네사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활을 움직였다. 빗물이 스며 미끄러울 법한데도 연주는 막힘없이 이어졌다. 조슈아는 더 다가가는 대신 멈추고 말았다. 빗소리가 그의 기척을 지워줘서 다행이었다. 바네사는 그야말로 무아지경에 빠진 듯했다. 이미 한참 전부터 비를 맞았는지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 조슈아의 사고가 삐걱댔다. 바네사가 자신을 눈치채기 전에 어서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 반, 연주가 끝날 때까지 이 자리를 지키고픈 마음 반이었다. 결국 조슈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멀거니 서서 바네사를 지켜보았다. 바네사 못지않게 비로 젖어감에도, 하다못해 근처 나무 아래로 자리를 옮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땅에 발이 박힌 것처럼.

 

 “……조슈아 경?”

 

 어느 순간 연주가 멎었다. 악기를 든 팔이 아래로 늘어졌다. 바네사의 눈동자가 조슈아를 향했다. 조슈아는 당장 얼굴을 가리고픈 충동을 억누르며 시선을 피했다. 바네사는 상대가 하는 양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파견을 가셨다고 들었는데 오늘이 귀환이었군요.”

 “……예.”

 “언제부터 계셨던 겁니까?”

 

 조슈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빗물이 눈으로 들어가 따가웠지만, 깜박이지도 못했다. 참을성 있게 조슈아의 답을 기다리던 바네사는 상대가 대답할 마음이 없음을 알고 활을 고쳐 쥐었다.

 

 “계속 이곳에 계실 건가요? 그렇다면 제가 자리를 피해드리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그럼 조슈아 경이 떠나세요. 등을 보이기 싫으시다면, 제가 뒤돌고 있을까요?”

 

 명백한 축객령에 조슈아가 볼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바네사의 반응은 당연했다. 그는 바네사의 공간에 난입한 불청객이었다. 그러나 발이 영 떨어지지 않았다. 되레 조슈아의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왜 비를 맞으며 바이올린을 연주하시는 겁니까?”

 “경에게 말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예상했지만 역시나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솔직히 이렇게 상대해주는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지금은 같은 소속의 기사일지언정, 조슈아가 바네사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가족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은 불변이므로. 조슈아는 어느 날 갑자기 바네사가 제 목을 조르더라도 기꺼이 내어줄 요량이었다. 눈앞의 이에게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해도, 언제나 품고 다니는 주제넘은 속내였다.

 

 문득 조슈아는 바네사를 감싼 물안개가 마치 영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없이 많은 영혼들이 뭉쳐 하나의 안개로, 바네사 곁을 맴도는 것만 같았다. 분명 자신이 처형대로 내몰았던 알드 룬의 왕족들이리라. 저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죽였던 알드 룬의 국민들이리라. 분명 아까까지는 평범했던 빗소리가 처절한 울부짖음처럼 들려서,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조슈아 경.”

 

 그때 바네사의 낮은 목소리가 허공을 두드렸다. 조슈아는 눈만 올려 바네사의 얼굴을 잠깐 담았다가 도로 떨어뜨렸다. 사박사박, 풀을 밟는 소리가 났으나 딱히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다만 바네사가 조슈아의 정면으로 위치를 옮겼을 뿐이다. 이어 그는 바이올린 턱받침에 턱을 얹고, 현 위에 활을 얹었다.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당신이 이 연주를 들었으면 합니다.”

 

 줄을 조율하느라 내리깔았던 눈이 조슈아에게 고스란히 꽂혔다. 조슈아는 그 올곧은 눈빛을 피하지 못했다. 바네사가 강조하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끝까지.”

 

 조슈아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연주가 시작됐다. 몇 소절쯤 이어지고 나서야 조슈아는 바네사가 무엇을 연주하는지 깨달았다. 이것은 죽어간 알드 룬의 사람들한테 바치는 진혼곡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조슈아에게 전하는 일종의 메시지였다.

 

 알드 룬의 왕녀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이 갈루스 제국 특임대의 지휘관 조슈아 레비턴스에게 고한다.

 너는 절대로 네 죄로부터 도망쳐서는 안 된다고.

 도구가 아닌 사람으로서, 자신이 저질러 온 짓들을 모두 속죄해야 한다고.

 너로 인해 상처 입은 이들의 증오와 원망을 오롯이 받아내라고.

 나는 그것을 끝까지 지켜볼 것이라고.

 

 조슈아는 비가 와서 다행이라 여겼다. 바네사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이 눈물이 아닌 빗줄기라고 착각할 수 있으니까. 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의 젖은 얼굴을 대할 수 있으니까.

 

 비는 그치지 않는다. 연주도 끊이지 않는다. 단 한 명의 연주자와 단 한 명의 청중이 빗속 연주회를 계속해서 이어나갈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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