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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시절
아이셀@Aysel_LOH

《장마》

 

 

 

 

 새벽부터 시작된 비는 잦아들 기미도 없이 계속해서 내렸다. 비가 내릴 때면 맑은 날을 상상할 수가 없게 된다. 세상이 영원히 잿빛일 것만 같다. 묵직한 구름이 어깨를 짓눌러 몸을 가누기가 어렵다. 쉴 새 없이 들리는 물소리가 머릿속까지 들어찬다. 찰랑, 찰랑. 홍수라도 날 것 같지만 끝내 터져 나오지는 않는다. 조슈아 레비턴스는 그 홍수가 무엇에 의한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빗물인지, 혹은 기억의 범람인지. 그저 평소보다 더 무기력함을 느끼며 지금 기분을 세 글자로 뱉어 본다. 불쾌해.

 습기를 머금은 종이의 감촉이 기분 나쁘다. 잉크는 마르질 않고 제복도 유난히 진득하게 들러붙는 것 같다. 묘하게 스며드는 한기에 옷깃을 고쳐 보지만, 별 소용이 없다. 어디에서 흘러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제 뼛속에 깊이 새겨진 것일지도. 깊은 곳에서부터 얼어가는 걸 모르고 있다가, 갑작스런 햇살을 만나 여기저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가끔 가슴 한쪽이 쓰렸다. 비는 그 틈새를 후벼 파는 것 중 하나였다. 그저 견디는 수밖에 없다는 것. 그 하나만큼은 명확했다. 견디지 못하면 빗물과 함께 쓸려가고 만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겠지.

 

 결국 펜을 내려놓는다. 한숨이 길게 흩어졌다. 집무실에는 저 하나뿐이었다. 로드는 갑작스런 호우에 피해를 입은 곳은 없는지 살피러 나갔고 루인은 비가 새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나간 참이었다. 밀린 서류는 자연스레 조슈아의 몫이 되었다. 빗속에 파견을 나가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축축한 공기 속에서 활자와 씨름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뭐가 이렇게 많냐. 손목이 쑤시니 어쩌니 하면서도 착실하게 급한 안건부터 해결해둔 참이었다. 나머지는 두 사람이 돌아와서 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

 천장만 노려보던 조슈아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끈한 홍차 한 잔이 간절했다.

 

 구두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모두 비에 젖어버리기라도 했는지, 복도를 거니는 동안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문득 낯선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아주 낯선 소리는 아니었다. 빗소리가 섞여서 다르게 들리는 것 같았다. 조슈아는 창밖을 건너다 보다가 방향을 바꾸었다. 조금 걸음을 재촉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밖으로 나가자 지붕 끝에서 빗방울이 줄줄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소리는 맞은편 건물에서 들리고 있었다. 기억대로라면 서고였다. 평소라면 여기까지 소리가 닿지 않을 것이었다. 닿는다 해도 멜로디를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바깥 공기가 꽤 차가웠다. 조슈아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걸음을 옮겼다. 제가 도착하기 전에 연주가 끝난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아주 조금은 끝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P

 

 이런 음색을 가진 바이올리니스트는 세상에 한 명밖에 없었다. 어디서 듣더라도 그녀의 연주만큼은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고 문을 열자마자 건물 가득 들어찬 음률이 느껴졌다. 비는 좋은 반주자였으며 책은 교양 있는 청중이었다. 조슈아는 그들만의 세계에 침범한 불청객이 된 기분이었다. 조심조심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연주를 깨뜨릴까 봐 발소리는커녕 숨소리까지 죽였다. 서가 너머로 부드러운 움직임이 언뜻 보였다. 바네사의 활은 때로는 상대를 쓰러뜨리는 활(弓)이었으며, 때론 생명의 파도로 너울 쳤으며 또 때로는.

 

 누군가의 영혼에 장맛비로 내렸다.

 

 바네사는 창가를 보며 연주하고 있었다. 이따금 음악에 심취해 몸을 움직이기도 했다. 그때마다 치맛자락이 사락사락 흔들렸다. 단조에서 장조로 넘어가면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활을 쥔 손끝도 상냥해졌다. 좋은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오래된 서적과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비 냄새가 어우러져 추억의 향기를 만들어 냈다. 연주를 구경하러 모여든 정령들처럼, 빗방울이 유리창을 똑똑 두드렸다.

 

 연주는 한 곡 더 이어졌다. 밝고 차분한 음조였다. 그리 길지는 않았다. 연주를 마친 바네사가 바이올린과 활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창밖을 보던 그녀가 말했다.

 

 "숨어 있지 말고 나오세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뻔했다. 조슈아는 머쓱해져서 서가 밖으로 나왔다. 발소리를 들은 바네사가 돌아보았다.

 

 "집무실에서 바쁘신 것 같던데."

 

 두고 온 일이 생각나 양심이 따끔거렸다. 어쩐지 혼나는 기분이었다. 바네사가 업무의 잔여량을 알 리가 없었지만.

 

 "급한 일은 다 끝냈어."

 "거기까지 제 연주가 들리던가요?"

 "복도에는 조금."

 

 폐를 끼쳤나 싶은 얼굴이어서 '워낙 조용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는 말을 얼른 덧붙였다. 조슈아는 바네사가 한 음절을 발음할 때마다 바뀌는 미세한 표정, 눈빛의 변화, 제게 닿을 때마다 바뀌는 온도 따위를 전부 읽어냈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습관이라 해야 맞았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절대로 읽을 수 없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언어로 쓰인 책처럼. 바네사가 다시 바이올린을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옅은 한숨이 들렸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건가요?"

 "미안. 나가 줄......"

 "당신은 늘 숨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에 하나네요."

 "........"

 "제대로 앉아서 들으라는 뜻이었어요. 들을 거라면요."

 

 그래도 되는 건가. 조슈아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갔다. 헛기침을 하고는 적당히 의자를 가져왔다. 저도 모르게 바른 자세로 앉게 되는 것이 있었다.

 

 "조슈아 경은 비를 좋아하시나요?"

 "그다지."

 "이유라도?"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거든."

 "그런가요. 저도 그런데."

 

 하지만 바이올린을 켜고 있노라면 조금 좋아지는 것도 같아요. 바네사가 바이올린에 활을 얹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음이 듣기 좋을 만큼 길게 늘어졌다. 현을 흔드는 손끝에는 굳은살이 단단히 박혀 있었다. 바네사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빗소리와 바이올린 소리만이 세계의 전부였다. 조슈아도 아는 곡이었다. pathetique. 비창. 다른 말로는 비탄. 그러나 음악은 감미롭기만 했다. 신의 눈물처럼.

 

 조슈아는-어쩌면 처음으로-바네사의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속눈썹이라는 장막이 내리고서야 비로소. 눈치를 본다고 해야 맞을 습관에서는 그야말로 스쳐 지나가는 것뿐이었다. 단단하고 맑은 유리구슬같은 그 눈을 오롯이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연주는 늘 저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그리 될 수도 없었다. 조슈아는 바네사의 이름으로 내리는 비를 맞고만 있었다. 무언가가 전부 쓸려 나갈 때까지. 바라서는 안 될 무지개가 뜰 때까지. 그러면. 이 장마가 끝나면.

 

 이 음악이 끝나면.

 

 바네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조슈아는 비의 첫 물방울처럼 빛나는 그 눈길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아무리 피해도 비는 끈질기게 그를 따라왔다. 세상이 온통 장마였다.

 

 "청중이 있으니 훨씬 낫네요."

 

 비를 조금은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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