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버리고 간 것
Whale@Whaleinred
《꿈》
언제나 꿈이 그곳에 있었다.
조슈아는 자신의 모아진 두 손 안에 나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날갯짓을 하는지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손을 펴서 안을 확인하지 않아도 그곳에 나비가 있다는 것을, 나비의 색깔까지 알 것 같다는 생각에 그는 새삼 놀란다. 본 적이 있는 나비인가? 의문이 생기자 자연스럽게 머리가 멈췄는데, 교육이 아닌 훈련이었기 때문에 이해는 동반되지 않았다. 조슈아는 즉시 의문을 도려내 손바닥 안에 감추기로 한다. 그러려면 모은 손을 열어야 했고, 날아갈 공간이 생기면 날개를 가진 생물은 날아가게 마련이었으므로 나비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었다. 정복자라면 한 번 가졌다고 여긴 것을 쉽게 놓아주지 않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쩐지 그는 상실이 반갑다. 익숙한 행위는 결과적으로 사람을 마모시키더라도 당장의 안도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건강하지 못한 방식이지만 더 나은 방법을 몰랐다. 기억 저편에서부터 그는 한없이 마모되기만 했는데, 아직 죽지 않았으니 극복쯤은 불필요한 낭비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한참이나 상념에 빠져 있느라 손을 열고 나비가 날아가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그게 아쉽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조슈아의 시선이 손바닥 안쪽에 닿았다. 그곳에 나비가 있었다. 여전히. 그는 나비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알아챈다. 나비는 얇은 두 날개를 조용히 붙인 채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의 살갗에 닿아 있었다. 그가 사냥했던 것들은 모조리 다가올 폭풍을 알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날갯짓했는데, 이 나비는 살아 있으면서도 침묵할 줄을 알았다. 조슈아는 그제야 나비의 색을 확인한다.
날개는 나무둥치의 갈색이고 무늬는 들판을 채운 초록이었다. 이 색깔을 어디서 보았지? 그는 희미한 기억을 되짚어보지만 머릿속은 온통 불길로 가득하다. 들불이 번지는 토양과 그곳에 세워진 집과 성, 밭과 저택이 모조리 붉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그곳이 나비의 집이었음을 안다. 그는 나비에 대한 사실을 많이 알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전부 과거의 일처럼 여겨졌다. 왜일까? 그는 정복자기에 제 손으로 꽂은 깃발 아래서 전지전능한데. 그는 왕국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고 또 되돌릴 수 있을 텐데, 어떤 것은 영원히 잃어버려서 찾을 수 없는 듯했다. 조슈아가 영원히 바꿔버린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데 나비가 날갯짓을 했다. 나비의 탓은 아닐 테지만 바람이 크게 불었고, 그는 얇은 몸과 가냘픈 다리를 가진 것처럼 나비와 함께 바람에 휩쓸렸다.
나비는 쏜살같이 날았다. 조슈아는 휘몰아치는 바람에 흔들리면서 언젠가 나비를 놓치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나비는 작았고 바람은 거대했으며, 사실 조슈아도 바람의 일부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곳에 바람을 몰고 왔어. 그는 생각했지만 혹시라도 나비가 들을까 말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면 사라지는 진실이 있다. 거짓말이 그 위로 눈처럼 쌓이면 어떤 봄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조슈아는 나비가 살아야 할 장소가 봄이라는 것을 진리처럼 알면서도 그들이 영원히 겨울에 있었으면 했다. 눈을 멈추고 정원을 가꾼다면 봄으로 착각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어설프게 굴었다.
그러나 그곳에 여전히 꿈이 있었다.
마침내 나비가 어떤 방문 앞에서 멈췄다. 바람은 여전히 등 뒤에서 불어왔다. 잘 조각된 나무 문에 나비는 자꾸만 부딪혔다. 문을 열면 바람이 빠져나갈 공간이 생길 거라고, 누군가 조슈아의 마음 안쪽에서 속삭인다. 아니면 적어도 나비가 들어갈 공간은 있을 거야. 그런데 어쩐지 문을 열지 못했다.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했고, 그 전까지는 결코 이 문을 열지 않겠다고 맹세라도 한 것처럼 조슈아는 머뭇거린다. 몇 번이고 부딪히자 나비의 날개가 찢어질 것처럼 떨려왔다.
그는 별 수 없이 문을 연다. 나비를 위해서 하는 거야. 핑계는 선의의 탈을 뒤집어쓰자 놀라울 만큼 좋은 이유가 된다. 안에 있는 사람이 그를 이해해줄까? 조슈아는 문득 겁을 집어먹었다가 도로 내뱉었다. 안에 있는 게 누군지도 모르잖아. 여차하면 죽여버리자. 귀찮게 해명하거나 형식과 절차를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제국의 개다. 사람이 개로 불릴 때는 상황을 고려하는 법 따위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는 모순된 생각을 한다. 그리고 조슈아가 열어버린 문틈 사이로 그는 옅은 절망의 냄새를 맡는다. 인식과 이해, 반추와 판단의 냄새를 맡는다.
그 안에는 갈색머리 소녀가 있다. 어깨부터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긴 잠옷을 입고 소매는 몇 번 접어올렸다. 손목이 드러나야 바이올린을 연습하기 쉬운 탓이다. 머리카락은 잘 빗어 윤기가 흐르고, 꾸미지 않았는데도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이곳은 그녀의 침실이기에 모자도 외투도 없고 그저 침대와 바이올린, 절망을 모르는 왕녀 한 사람뿐이었다. 불청객이 문을 열었지만 그녀는 가장 안전한 곳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악기를 만지고 있다. 조슈아는 문득 그 악기를 질투한다. 왕국에서 그것과 비슷한 소리를 내는 악기를 모두 부수고 사흘 밤낮으로 불태워 누구도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에게는 그러한 힘과 권한이 있었고, 휘두르는 것만이 생존의 길이었다. 그런데 오직 자신의 행복과 욕망만을 위해 무언가를 망가뜨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처음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다는 욕망이, 그것의 실현을 추구하는 마음이 그의 안에서 싹튼다. 이것을 잘 키우면 사람으로 살 수도 있겠지. 선악을 구분하고 스스로 악의 길을 걸을 수도 있겠지. 행동을 정당화하고 죄책감의 무게를 잴 수도 있겠지. 조슈아는 그 모든 것이 두려웠다.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걷는 대신에 그저 소녀의 손을 잡고 그 위에 입맞춘 뒤 모든 것을 용서받고 싶었다. 그녀의 언어만을 귀에 심고 허락을 기다리며 살고 싶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까? 때로 사랑은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그가 열어젖힌 문 안쪽으로 나비가 들어간다. 그것은 조슈아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래, 여기 거짓이 있다.
조슈아 레비턴스는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다. 알드 룬 왕궁의 천장이 그를 직시하고 있다. 그의 잠을 방해하도록 커튼은 모두 젖혀졌고 창문 너머로 끝없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점령에 불복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으나 시신을 처리할 수 없어 선택한 방법이었다. 최악의 방식이지만 더 나은 방법을 몰랐다. 기억 저편에서부터 그는 한없이 잔인하기만 했는데, 누구도 살해에 성공하지 못했으니 조심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그는 살해당한 기분이 든다.
자신이 이곳을 영원히 바꿔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달라져왔고, 변화에 반항하지 못해서 그 사실을 통째로 잊어버리고 있을 뿐이었다. 꿈 속에서 만지고 싶었던 보드라운 손이 떠올랐고, 그 손의 주인이 서 있던 창문가를 바라보았다. 바이올린도, 잠옷을 입은 소녀도 그곳에 없다. 양탄자가 깔린 바닥에는 잘린 머리카락만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당신이 버리고 간 것.
조슈아는 진실을 몇 가닥 집어들었다.
나는 계속 당신이 버리고 간 것들의 꿈을 꾸겠지.
내가 포기하게 만든 것들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