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의 연애
디펜스@defense_jv
《장마》
* 네임버스
이 세상에 이름이 있는 생물이라면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을 즈음 원치 않아도 몸에 한 가지 각인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을 ‘네임’이라고 부른다. 네임은 운명의 상대를 상당히 단도직입적으로 알려주는 매개체로 이를 신봉하는 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으나, 거부감을 느끼는 자 역시 적지 않았다. 물론 언제나 예외의 경우는 있었으니, 알드 룬의 마지막 왕녀는 뛰어놀아야 할 어린 시절에 열병을 크게 앓았는데 그 때문일까? 그녀의 피부는 햇빛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사람처럼 희고 맑았다. 그 피부 위에선 그렇게 흔한 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바네사는 마치 자신에게 상기시키듯 습관처럼 저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네임에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식을 올려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애석하게도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네임이 없다는 것은 운명의 상대가 평생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세상이 그녀에게 내린 경고 아닌 경고였으니까. 반대로 여기 조슈아 레비턴스는 어떤 몰골을 하고 있는가. 매일 도구로써 반복해온 삶. 그에게도 네임은 그닥 중요치 않다. 어린 시절 등줄기를 따라 생긴 아름다운 활자에 대한 감상은 따끔하다. 이 한 줄이 다였으니까.
“네, 폐하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네! 오늘도 다녀오겠습니다!”
다른 위치에서 전혀 다른 울림이다. 오늘은 왠지 하늘이 흐리다. 손쉽게 조슈아는 알드 룬에 도착했다. 다음 달에 있을 작전을 미리 계획하기 위해서였다.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시각. 마침 졸음이 쏟아졌던 조슈아는 구름이 짙게 깔린 하늘을 이불 삼아 커다란 나무 아래에 자리 잡았다. 피곤한 시선을 풀들 위로 옮기자 보인 것은 감히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었다. 이것은 도구가 느껴서는 안 되는 감정이 분명했다. 조슈아의 안에서 응어리진 무언가가 그의 속을 굴러다니며 점점 더 몸을 부풀려갔다.
“저기…”
“ㄴ,네?”
잠깐 졸기라도 한 것인지 어안이벙벙해 보이는 바네사가 곧장 정신을 차리더니 활기차게 질문을 했다. 그 순간 조슈아의 마음속에서 느껴진 것은 죄책감? 모르겠다.
“저는 바네사예요 당신은 이름이 뭐죠?”
“조슈아… 조슈아 레비턴스다.”
어쩜 이렇게 당차고 아름다운 소녀가 있을까. 가슴이 두근거리고, 바닥이 울렁거리는 것만 같다.
“여기에서 뭘 하고 있었지?”
“악보를 쓰다가 그만… 잠들었지 뭐예요? 그러는 조슈아 경은 이곳 분은 아닌 것 같고…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니, 혹시 내일도 이곳에서 볼 수 있을까? 왕녀.”
“후후 알고 계셨네요? 물론이죠.”
처음 만나는 두 사람이 동시에 반할 확률은 잔인할 정도로 낮지만, 전혀 없지는 않다는 점이 희망을 심어준다. 방금 이 상황처럼. 지구가 다시 한 바퀴를 돌아 어제의 나무 아래. 이번에는 바네사의 손에 못 보던 악기가 하나 들려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이올린인 것 같은데 잡는 폼부터 심상치 않다. 저를 위한 연주를 시작하리라 예상하고, 자리를 잡는 조슈아는 제국의 8검이라는 칭호가 아까울 정도로 무해했다. 아름다운 선율이 커다란 나뭇가지를 타고 흘러 다시 조슈아의 귀로 돌아왔다.
“조슈아 경 당신은 네임이 있나요? 아니, 너무 당연한 걸 여쭤봤네요.”
“뭐가 궁금한 거지? 혹시 내 짝의 이름? 알려줄까?”
“아니! 말하지 마세요!”
들으면 무너질 것 같았다. 드디어 네임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을 찾았는데 스스로 네임 이야기를 먼저 꺼내버리다니. 얼마나 더 어리석을 셈인지.
“저는 사실 네임이 없어요. 웃기죠? 다들 있는 네임. 그거 하나가 없어서 제대로 된 연애도 한 번 못 해보고. 그렇다고 어설픈 연애를 하고 싶다는 건 아니에요!”
“내 말도 끝까지 들어주면 안 될까? 내 짝의 이름은 나도 아직 몰라. 나중에 당신이 봐주었으면 해. 여기 있거든.”
바네사의 손목을 잡아 그대로 자신의 척추 마디로 가져가는 조슈아의 행동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곁에 아무도 없었어. 그러니 내 등을 봐줄 사람도 없었고, 등을 맡길 사람은 더욱 없었지. 그러니 왕녀가 그 첫 사람이 되어줬으면 해 우리 내일도 보도록 하지.”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조슈아와 바네사가 어깨를 맞대고 평화롭게 낮잠을 자거나, 아름다운 바네사의 연주를 듣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P
“아니 왜 대체 일정보다 이렇게 일찍 알드 룬을 침공하시려는 겁니까?”
“내 말에 토를 다는 건 처음인 것 같군.”
“아닙니다…. 폐하의 명령대로 작전 준비에 들어가겠습니다.”
조슈아는 온갖 조바심을 토해내기도 전에 세뇌당해버렸다. 언제나 이 기분은 익숙해지질 않는다. 무의식을 의식의 영역까지 끌어올리는 기분. 분명 알드 룬에 도착한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온몸이 흠뻑 젖어있었다. 비릿한 냄새가 나지 않는 걸 보니 비다. 비? 그래. 비가 내리고 있었다. 폐허와 어울리는 비가. 왕녀는?
“바네사! 바네사! 어디있어!”
“조슈아. 당신이군요.”
내리는 비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목소리는 바늘이 되어 조슈아에게 쏟아진다. 아무리 의식이 없었다지만, 결국 조슈아 스스로 일궈낸 기승전결의 대가였다. 그가 처리하기에 왕녀는 아직 너무 약한 사람이었다. “바네사. 돌아가.”
애써 차오르는 눈물을 머금고, 등을 돌리자 흠뻑 젖은 셔츠 위로 바네사가 힘겹게 활자를 읽어냈다.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 당신 운명의 짝 이름이야. 잘 기억하도록 해 조슈아 레비턴스.”
왕녀는 분했다. 나약하고, 아직 모자란 자신의 실력이. 지키지 못한 모든 것이 분하고, 억울했다. 바네사의 앞에 등을 돌린 사내는 증오로 가득 찬 문장에는 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피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익숙한 감정이다. 저는 항상 가해자였고, 모든 사람은 피해자다. 빨리 쉬고 싶었다는 핑계를 대면서 서둘러 도착한 제국은 여전히 불편했다. 눈을 감아도 그녀의 표정이 선명했다. 증오심에 잔뜩 일그러진 눈을, 눈물을 여러 번 쏟아냈는지 빨갛게 부어오른 눈가를 제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프라우의 말을 빌려 안 봐도 비디오였다. 사람을 죽이고, 죄악감에 휩싸이지 않고, 평소처럼 삶을 살아가는 도구이자 괴물. 보고를 올리러 가야지. 몸을 일으켜도 빈 껍데기처럼 휘청거리는 게 고작이다.
“4왕녀가 도망쳤습니다. 상당한 실력자였습니다.”
약간의 꾸중을 듣곤 곧장 다시 침실로 향했다. 무력했다. 왕녀는 지금 즈음 평생 살아보리라 생각하지 못한 폐허에서 삶을 영위하겠지. 도구는 지금 태어나 처음 죄악감에 짓눌리고 있다. 몇 년이 지났을까. 다시 마주한 바네사는 여전히 당찬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이길 수 없었다. 당신은 그 폐허 속에서 비가 온 뒤 땅처럼 단단해졌구나. 과거의 악몽에 머물러있는 것은 나 혼자만의 이야기였구나.
“당신은 사람이에요. 도구가 아닙니다.”
아아. 이 얼마나 잔인한가. 도구에게서 도구의 명분을 앗아가려는 사람아. 나는 그대를 쏟아지는 빗물처럼 흘러넘치게 사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