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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뒷면
롭이어@kmkt_lopear

《꿈》

 

 

 

 

 이 모든 것은 꿈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조슈아 레비턴스는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을 끌어안는다. 여자치고 작지 않은 키는 입맞추기 좋아 그대로 숨을 섞는다. 왕녀는 거부하지 않고, 도리어 그의 품에 파고들며 입술을 연다. 마치가 그가 왕녀를 상처 입혀도 괜찮다는 듯이. 그러나 이 꿈에서만은, 그는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 누가 보아도 열렬한 연인의 모습이다. 현실 따위는 걷어차버리고 지금을 즐긴다. 희열이 몰아친다. 진작 이리 해야 맞았다는 해방감과 고양감. 이제 이 여자는 그를 사랑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조슈아 레비턴스는 제 침대에서 눈을 뜬다. 어둠에 휩싸인 천장을 노려보다가 시야가 뚜렷해질 즈음 제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넘긴다. 아무리 꿈이 무의식의 발현이라지만 도가 지나치지 않나. 이제 자기 자신에게는 비밀도 아니라는 건가.

 그는 분명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을 사랑한다, 그래서? 왕녀에게 무릎 꿇고 세레나데라도 바칠 셈인가? 겸사겸사 반지도 약지에 끼워주면 퍽이나 기뻐하겠지. 어쩌면 그 고결한 왕녀도 끝내 참지 못하고 그를 쓰레기 보듯 할지도 모른다. 그는 그따위 경거망동으로 왕녀와의 관계를 끝장내고 싶지 않았다. 겨우 함께 티타임을 갖는 수준까지 발전했는데, 어떻게 그것을 한순간의 망언으로 무너뜨리겠는가.

 물론 조슈아 레비턴스는 아주 영악한 남자였기에, 영원히 실패하지 않을 방법 또한 알았다. 모두 없었던 일 셈치고 이전처럼 행동하는 것. 왕녀가 아무것도 모르도록 내버려두면 다 괜찮으리라. 계속해서 아발론 왕성 뒤편의 정원 테라스에서 왕족과 그의 손님처럼 찻잔을 들어올린다면, 그들은 어쩌면 서로에게 웃는 얼굴까지 보일 수도 있었다. 흠잡을 곳 없는 가설에는 최상의 결과가 따를 터였다. 다만 조슈아 레비턴스는 거기에 한 가지 조건을 덧붙인다.

 그 여자의 무엇이라도 되고 싶다.

 그리고 완벽한 수식이 붕괴한다.

 

 꿈의 시작은 한 달 전이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망상으로 치부했다.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과 티타임을 갖기로 약속한 바로 그날 밤 그런 꿈을 꾸다니, 예의에 보통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아무리 상대를 가리지 않고 반말을 찍찍 내뱉는 작자라 해도 그 정도 도리는 알았다. 그러나 무의식은 그런 그를 비웃듯이 멈추지 않고 찾아왔다. 심지어 일주일쯤 되고부터는 키스로 끝나지 않았다. 조슈아 레비턴스는 잠들기가 두려워졌다. 우스운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왕녀만이 그의 불면을 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니.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어서, 그렇게 잠 못 이루기를 몇 주째. 어느새 시간은 흘러 그는 또다시 동상처럼 정원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왕녀는 조금 염려하는 듯한 얼굴로 묻는다.

 “조슈아 경. 요즘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조슈아 레비턴스는 왕녀 앞에서 웃지 않는다. 그저 고개를 젓는다.

 “별거 아냐.”

 당연하게도 믿지 않는 표정이 돌아온다. 왕녀는 고개를 조금 수그려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순간 숨이 멎는 듯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숨결이 가까워지고, 왕녀는 선을 지킨다. 지독할 만큼 경계를 넘는 법이 없는 여자다.

 “정말로 괜찮으신 건가요? 혹시 제가 주제넘게 질문하는 건 아닌지 염려되네요.”

 “상관없어.”

 

 지나치게 빠른 대답. 왕녀는 눈을 깜빡인다. 의아한 표정 앞에 혀를 깨물고 싶을 만큼 후회스럽다.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은 다시금 좀더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이야기한다.

 

 “혹시 무언가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신 거라면 저는 이만 돌아가볼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고.”

 

 괜히 말했나? 하지만 너와 더 오래 있고 싶은데. 너는 모를 테지만, 나는 사랑에 빠진 인간이거든. 조슈아 레비턴스는 짐짓 탐욕스럽기까지 한 마음을 눌러 담는다.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보인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이상하게 여기는 시선이 와 닿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는 이상하다 못해 미친 작자니까.

 

 예컨대, 눈앞에 앉은 여자의 손을 잡아보고 싶다고 생각한다거나. 흰 손가락은 바이올린 연주 때문에 다소 거칠지도 모른다. 그 손가락을 하나하나 어루만지고, 깍지를 끼어 맞잡아본다면. 망상은 비눗방울처럼 부풀다 일말의 양심이라는 이름의 바늘에 팡 터진다. 어떻게 네가 감히? 그러나 세상이 나를 낳은 것은 나 또한 무언가를 욕망할 수 있도록 함이 아닌가. 비틀린 욕망, 자라나는 갈증, 형체를 갖추는 마수. 조슈아 레비턴스는 짐짓 부드러운 목소리를 꾸며내어 말한다.

 “정 걱정된다면 부탁 하나만 들어주지 그래.”

 

 그리고 당신은 지나치게 선량한 인간이어서, 예상 안 답을 내놓는다. 적정 규격으로 잰 것처럼 반듯한 얼굴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요.”

 “고마워.”

 

 이것만은 꾸밈 없는 진심이다. 다만 저이는 모르리라, 조슈아 레비턴스는 그에게 단 한 번도 거짓을 고하지 않았음을. 당신 꿈을 꾸며 온갖 망상을 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 그렇고말고.

 

 “인사는 괜찮아요. 제가 도와드릴 게 구체적으로 뭔가요?”

 

 조슈아 레비턴스는 마른침을 삼킨다. 다소의 뻔뻔함이 필요한 대목으로, 피할 수 없는 절차다. 용기 내어 속삭이듯 답한다. 이건 미친 짓이야.

 

 “자장가를 연주해줘.”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은 가만히 그를 바라본다. 해괴한 소리를 듣고도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았다. 도리어, 아주 천천히, 조슈아 레비턴스라는 남자를 이해하는 것 같다. 꿰뚫어보는 듯한 감각에 그는 잠시 숨을 멈춘다. 그만, 더는 들여다보지 마. 이윽고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이 입을 연다. 그는 답을 듣기가 두렵다.

 

 “그렇게 해드릴게요.”

 

 당혹, 잠깐의 정적.

 

 “정말로?”

 “주무시는 시각을 알려주시면, 30분 전에 경을 방문할게요.”

 “바네사 경.”

 “네.”

 

 왕녀가 투명한 녹색 눈으로 그를 본다. 당신이 원한 것이 아니었느냐는 듯한 시선. 왕녀는 언제나 옳다. 조슈아 레비턴스는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하잘것없는 한마디를 흘린다.

 

 “고마워.”

 

 찰나 동안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의 시선이 흔들린다. 매끄러운 표정에 균열이 일고, 조슈아 레비턴스는 그 너머에 있는 무르고 상처받은 인간을 본 것만 같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의 일이다. 곧 그 얼굴은 다시금 견고해진다.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한 게 아니에요.”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하고 왕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는 실수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때 왕녀는 망설이는 듯하다가 그를 돌아본다.

 

 “오늘 밤에 뵈어요.”

 

 그러고는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정원을 떠난다. 조슈아 레비턴스는 찻잔들을 내려다본다. 아직 온기가 남았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내가 너를 욕망해도. 모르겠다. 사실 정답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기분이다. 이것이 오답이라 해도 너를 원한다.

 

 그리고 당연히,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은 약속을 지켰다. 정확한 시간에 맞춰 도착한 그를 보고 조슈아 레비턴스는 다소 황망해지기까지 했다. 이렇게 쉽게 올 줄 몰랐는데. 그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왕녀는 바이올린 가방을 든 채 올려다본다.

 

 “들여보내주지 않으실 건가요? 아니면, 여기서 연주해야 하나요?”

 

 조슈아 레비턴스는 결코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을 홀대할 수 없다. 당연한 진리지만, 왕녀에게만은 당연하지 않은 듯싶다. 그것도 뻔한 이유다. 다만 조슈아 레비턴스는 왕녀에게 제 방 문을 열어준다.

 

 “들어와.”

 

 그의 방은 퍽 삭막하다. 군인 출신답게 반듯하게 개어놓은 침구는 특징조차 되지 못하며, 꺼낸 것 없이 깨끗한 책상은 황량해 보일 정도다. 왕녀는 방 안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곧 서로를 향해, 그와 눈이 마주친다. 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왕녀에게서 고개를 돌린다. 왕녀가 그의 등을 보는 것을 느끼지만, 그 또한 찰나다. 왕녀는 바이올린을 꺼낸다.

 

 “한 달째 꿈을 꿔. 매번 비슷하면서 다른 내용으로. 그래서 잠을 제대로 못 자는 중이지.”

 “루인 경이 최근 경의 업무 효율이 부진하다고 하셨던 기억이 나요.”

 

 그 사람, 뒷말을 했겠다…… 하는 생각도 잠시. 그는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이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기억한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랬어?”

 “네. 로드께서도 걱정하시는 것 같던데, 경이 분명 업무 외 일로 피곤한데도 통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고. 그분을 걱정시키셨어요.”

 

 묘하게 힐난하는 듯한 어조에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조슈아 레비턴스는 모른척 제 턱을 매만진다.

 

 “아무튼, 바이올린을 그렇게 잘 켠다고 다들 칭찬이 자자하던데.”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세를 잡는다. 집중한 얼굴은 이미 프로 연주자나 마찬가지다.

 

 “그분들의 찬사에 부끄럽지 않은 연주를 들려드릴게요.”

 “그래.”

 

 그리고, 선율이 시작된다.

 연주를 들으며 조슈아 레비턴스는 생각한다. 그는 알드 룬이 패망한 후 일부 가신을 이끌고 달아난 4왕녀에 관한 보고서를 한 장 한 장 넘긴 적이 있다.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그 연주에 치유의 기운이 서려 있다는 문장을 무심히 지나쳤다. 회복보다 파괴가 빠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으며, 실제로도 그랬다. 로드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세뇌가 풀린 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수없이 고민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거대한 해일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에서 파편을 그러모아 이것이 조슈아 레비턴스라고 말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무수한 책임이 주어졌다. 그를 바라보는 아발론 기사들의 시선은 다양했다. 제국의 부역자, 사정을 참작해야 하는 고아 출신 피해자, 혹은 판단 보류. 어느 쪽도 달갑지 않았다. 황제 외 사람에게 평가 혹은 판단받는 일에 익숙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 또한 버려야 할 태도였다. 가진 것 중 떠나보내야 할 것의 목록이 너무도 길어, 그는 자주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 그를 붙잡은 것은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의 존재였다. 그 여자는 그의 가장 거대한 공포이자 등대였다.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 여자에게, 그는 온갖 망상을 품다 못해 기어이 제 방에까지 들여 자장가 따위를 청해 듣고 있다. 실로 비루하기 짝이 없는 남자다.

 

 그가 생각에 빠진 사이,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은 혹여나 한 번으로는 부족할까봐 자장가를 거듭 연주하고 있다. 조슈아 레비턴스가 입을 연다.

 

 “그만. 이제 충분해.”

 

 활이 멈추고, 여자가 그를 바라본다. 입술이 벌어진다.

 

 “정말로요? 하지만 경, 전혀 졸려 보이지 않는걸요.”

 “괜찮아, 나는.”

 

 거짓말이다.

 

 “이 정도 연주로 피곤하지 않아요. 더 들려드릴게요.”

 “아니, 넌 내게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돼.”

 

 너는 그런 사람이야. 그 말을 삼키지만, 상대는 이미 들은 것만 같은 얼굴이 된다. 바이올린과 활을 내려놓고, 그에게 순식간에 다가온다. 그 와중에도 발소리 하나 내지 않는 우아한 걸음걸이에 그는 내심 감탄한다.

 

 “그건 당신이 할 말이 아니에요.”

 

 그래, 이 굳은 얼굴이야말로 내 몫이지. 조슈아 레비턴스는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의 굳게 다물린 입매에 시선을 준다. 꿈에서 저기에 입맞추었는데.

 

 “알고 있어.”

 “안다니 다행이네요.”

 

 그러고는 바로 몸을 돌린다. 갈색 머리카락이 흰 목을 스치는 것을, 그는 훔쳐본다. 그 사이로 왕녀의 목소리가 파고든다.

 

 “내일 같은 시각에 다시 올게요. 그때는 좀더 나은 상황이기를 바라지요.”

 

 그는 대답하지 않지만,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은 바이올린 가방을 챙겨 나간다. 치맛자락이 복도 모퉁이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침대에 드러눕는다. 아직도 왕녀 특유의 향기가 감도는 방 안. 그는 천장을 노려본다. 오늘 꿈은 더욱 지독하리라. 어쩌면 한바탕 뒹굴어버릴지도 모르지. 어찌 되든, 왕녀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터다. 그 사실 하나면 충분하다. 조슈아 레비턴스는 비틀린 미소를 짓는다.

 

 그거 알아, 바네사? 난 끔찍할 만큼 네 생각을 해. 아마 네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으로.

 

 그리고 그는 모른다.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이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제 얼굴을 가리고, 오늘의 꿈 속 배경은 좀더 선명하겠노라고 예측하는 것을. 그럼에도 수면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그 모든 노력은 그가 그로서 굳건하기 위함임을. 다음날도 여전히 말끔한 얼굴로 나타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그는 언제나 그 왕녀의 역린이고, 조금은 어찌할 수 없는 자가 되어 있다. 책임 하나 지지 않고서 그저 바라기만 하는 마음가짐조차도 더없이 인간임을 왕녀는 이미 이해한다. 인정한다. 그가 생애 어느 순간보다도 인간답다는 사실을.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꿈의 뒷면이다.

 

 밤의 아리아가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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