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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기탈리스(Foxglove)
유니스

《자유주제-짝사랑》

 

 

 

 

 누가 알았을까, 조슈아 레비턴스의 운명을. 그리고 바네사 테레즈 알 드 룬의 운명을. 두 사람은 본디 좋은 연이 이어질 일이 없었다.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시절, 조슈아 레비턴스는 제국의 8검이었고 바네사 테레즈 알 드 룬은 몰락한 왕국의 제 4 왕녀, 그리고 해방을 꿈꾸는 투사였다. 황제의 대적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조슈아는 단순히 그가 왕녀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고, 바네사는 제 형제의 죽음에 슬퍼하고 분노하다가 끝에는 늘 제국의 8검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모든 변화는 대적자가 조슈아 레비턴스를 해방해주면서 시작되었다.

 

 바네사는 제국의 제일 충성스러운 8검 중 한 명인 조슈아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못했기에 용서는 이뤄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예 용서할 생각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바네사는 그가 사람이었기에,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갖고 그에게 마지막일지도 모를 기회를 줬다. 다른 선택을 하고, 성찰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그는 이 기회를 붙잡았다. 한줄기의 가늘지만 튼튼한 동아줄이 내려졌고 비록 그는 과거에 비해 게으르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무기력해졌지만, 황제의 대적자인 로드 휘하의 기사가 되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가 주어졌다.

 

 그에게 있어서 바네사는 어떤 존재일까? 구원자, 관용을 베푼 자, 과거의 적이자 현재의 동료, 아무리 세뇌였다지만 자신이 잔인하게 찢으려 했던 자. 전부 다 맞는 말이지만 다른 이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조슈아 레비턴스에게 있어서 바네사 테레즈 알 드 룬은 동료이기도 하고, 구원자이기도 하고, 관용을 베푼 자이지만 동시에 그의 짝사랑 대상이었다.

 

 무기력해진 그의 인생에서 현재 최대의 고민은 이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냐는 것이었다. 바네사에게 감히 연정을 품으면 안 되는 대상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그가 제일 잘 알았다. 세뇌에 풀린 직후에는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었고, 세뇌가 풀리고 선량한 마음이 돌아오자 바네사는 그의 죄책감 그 자체이자 구원자였고, 로드의 휘하에 들어간 이후부터는 동료가 되었다.  동료라는 위치조차도 실은 과분했을지 모른다. 조슈아가 제국의 피해자인 것이 사실이라고 그가 바네사의 입장에서 가해자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슈아는 바네사와 동료가 된 이후에도 거리를 두고 지냈다. 바네사 쪽에서도 감정이 풀린 상황이 아니어서 둘 사이는 분명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어색함 속에서도 그의 눈은 자신을 구원해준 바네사를 향하고 있었다. 자신을 죽을 때까지 미워한다 해도 할 말이 없는 그 여자가 무슨 마음으로 자신에게 기회를 줬는지 궁금했다. 이 작은 호기심은 물속에서 번지는 잉크처럼 마음속에 더 번져버리고 말았다. 왜 기회를 줬는지 넘어서 그 붉은 머리의 여성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당신은 무엇을 좋아할까. 당신은 무엇을 싫어할까. 나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할까. 당신의 성격은 어떨까. 당신의 특기는 바이올린이었지. 그러면 취미는 뭘까. 당신은...... 어떤 사람일까 바네사 테레즈 알 드 룬.'

 

 그렇게 보기만 하는 사이에 감정은 커져만 갔다. 사소한 질문은 곧 바네사 본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그 호기심을 충족하고 싶은 마음에 그의 시선은 가능한 바네사를 따라가게 되었다. 바네사를 바라보는 시간, 신경 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슈아는 원하는 대로 바네사에 대해 더 알게 되었다. 귀여운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 바이올린 연주를 잘하는데 이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배워서 그렇다는 사실, 그리고 보기보다 심지가 강하다는 사실까지 전부 알게 되었다. 그 단단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에게 빠지는 일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지 인간적인 호감을 느낄만하다. 조슈아 또한 바네사에게 호감이 있었다. 다만 이 호감은 굴러내려 가는 눈덩이만큼 커져서 어느새 연정으로 변질하였다.

 

 사랑은 숭고한 감정이라지만, 변질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이 이 사랑이라고 조슈아는 생각했다. 그가 감히 바네사를 그런 눈으로 보다니. 아직 용서도 제대로 해준 적이 없는 바네사이다. 그런 바네사에게 연정을 품은 것은 그의 순수한 존경과 호감이 변해버렸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를 사랑하게 되면서 자신과 바네사 사이에 그어진 선을 넘고 싶어진 조슈아이다. 품어도 좋을 것이 없는 욕망과 마음을 품어버렸다. 감히 가지면 안 될 마음을 품어서 그런 걸까. 그의 마음은 천천히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바네사에 대한 사랑으로 돋아난 마음속 새 살은 금방 그 똑같은 사랑으로 인해 썩어들어가곤 했다. 이 사랑은 약이자 독이 되었다.

 

 사랑이 한 번 커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야지 그 열기가 식고,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에는 그 열기가 평생을 간다고 한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조슈아이기에 아무리 누른다고 해도, 그 억눌린 마음을 완전히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억눌렸던 마음속의 독과 같은 사랑은 조금씩 그의 마음으로부터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업무 때문에 어딘가 갔다 올 때면 그는 무난하지만 바네사가 좋아할 만한 간식을 사 오곤 했고 바네사가 연주를 할 때는 아닌 척하면서 늘 참석했다. 그의 피드백을 듣기는 어려웠지만 바네사의 연주를 듣는 그의 모습은 진지했고, 연주가 끝날 때쯤에는 언뜻 보면 보기 힘든, 희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천천히 하지만 누군가는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바네사 곁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터트릴 뻔한 날이 왔다. 바네사가 그의 변화를 눈치챈 그 날, 조슈아는 디기탈리스꽃이 많이 심어진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바네사는 조슈아의 건너편에 앉은 다음 그에게 물어봤다.

 

 “...좋은 오후에요.”

 

 의례적인 인사 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둘 사이니 놀랍지 않은 일이지만 전보다 이 침묵이 아쉬운 조슈아였다. 먼저 말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바네사가 물어봤다.

 

 “아니라고는 생각하지만, 제게 혹시.... 관심 있으신가요?”

 

 그 질문에 조슈아는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바네사가 그 질문 뒤로 민망하다는 듯 덧붙인 말들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냥 왕성에서 일하는 아이가 그렇게 말하더라, 나는 아닌 것 같다, 그냥 동료니까 친절하게 대하는 거 아니냐. 그런 말들을 늘어놓는 바네사 앞에서 충동적으로 그는 외치고 싶었다.

 

 ‘당신에게 관심이 있어. 더 알고 싶고 더 친해지고 싶고. 나는 당신을...’

 

 이런 생각을 하고 몇 초 후, 그는 그렇게 외치고 싶은 자신에게 놀랐다. 이 마음이, 본인 앞에서도 흘러나올 뻔한 사실에 경악했다. 자신의 마음은 자신에게는 약이지만 동시에 독이고 바네사에게는 독일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바네사가 어느새 말을 덧붙이지 않고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자, 그는 한마디를 했다.

 

 “고마운 사람, 그리고 동료로 생각해.... 먼저 일어나보도록 하지.”

 

 조슈아 레비턴스는 용케 하고 싶은 말을 억눌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이번에는 이 감정을 억누르는 데에 성공했다. 로드랑 자신의 구원자 바네사는 그에게 마음을 줬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다시 깨닫게 해줬고 죄책감이 뭔지 알려줬고 용서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어줬다. 그렇게 불어넣어 준 바네사의 숨결이 마음에 닿았던 날에는 바네사의 선택이 고통스러운 축복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어떤가? 축복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약인 동시에 자신을 괴롭게 하는 독이 되었다. 이 독이 그의 마음속에서 조금씩 지독한 흉터를 남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아픔조차도 바네사가 줬다고 생각하며 행복해하는 이 남자는 속절없이 오늘도 아무도 못 들을 사랑 고백을 자신의 방에서 허공에 속삭인다.

 

 "사랑해. 바네사."

 

 그 열기 어린 사랑의 고백은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마음속의 독과 같은 이 사랑을 언제까지 숨길 수 있는지 모르는 조슈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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