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에
H@HaemLOH
《자유주제》
재앙이 닥쳤다.
맹주를 잃은 아발론 동맹은 휘청이다 거꾸러지고 말았다. 급격히 팽창한 제국은 전제군주를 잃고 체자렛 알티온마저 홀연히 사라진 뒤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상실에 따른 당연한 반동이 세 대륙을 혼란케 했다. 그 격동과 혼란의 시기, 다가올 침공에 대비를 갖출 여유가 남아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살아 있는 자들이 무방비한 상태에서 맞이한 적은 감히 비할 수 없이 막강했다. 그들이 완벽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더라도 아주 간결하게 짓뭉개졌을 것이다. 재앙의 도래로 세계의 미래는 명료히 결정지어졌다. 수렁 같은 두려움과 절망적인 공포가 세상을 좀먹는 중에, 허무에 고개를 묻은 조슈아 레비턴스는 자신이 지지리도 운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 괴롭지도 억울하지도 않았다. 그와 운명은 데면데면한 사이였으니, 애초 자신의 ‘새 출발’이 순탄하길 기대한 적이 없었다. 한때 그의 근본이자 전부였던 제국이 공중분해되는 꼴을 지켜보노라니 혀 아래에 씁쓸한 감흥이 남긴 했어도, 이제 와 과거를 곱씹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멸망이 목전까지 들이닥쳤대도 그가 무엇을 아까워하겠는가? 곁가지로 나고, 꺾이고,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삶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그는 안타까움도 죄스러움도 어떤 사람다운 미련도 모르고서― 생각하지 않은 채로 평온히 죽음을 맞이할 터였다.
확실히 예고된 죽음. 그것은 주체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폭풍에 휘몰린 가슴도 차분히 가라앉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런 다짐이 무상하게도 지금 조슈아 레비턴스는 종결을 각오하고 전선에 뛰어든 자들의 옆에 있다. 등 뒤의 왕녀를 다분히 의식하면서. 무의미하게 죽어 나가는 목숨에 힘을 쏟으며 분투하는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의 지근거리에.
그는 여전히 왕녀가 무슨 생각으로 그를 용인했는지 알지 못한다. 유감스럽게도 남자는 사육되고 훈련받은 제국의 번견에서 거의 나아지지 못했고, 주인 잃은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갈 곳을 알지 못해 아발론의 잔류 병력 뒤를 따르겠다 생각했지마는 우습고 얄팍한 핑계임을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한때 있었다고 믿었던 목적은 존재 이유를 잃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구태여 희망 없는 일에 자신을 내던지는 건 그답지 않다.
그냥 죽어 버리면 된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이전과 같은 결단은 나오지 않았다. 미련이 발목을 잡아끌었다. 여자의 눈과 꼭 같은 흐린 빛의 세상은 가망이 지고도 찬란하니 그대로였다.
해서, 굳이 알드 룬의 그녀 옆에 꾸역꾸역 서 있다. 그림자 진 눈에 자신이 비치는 것을 감내하고서. 명령하는 이 없는데도 홀로 판단해 행동했다. 합당한 이유나 마땅한 논리가 들어먹지 않는다. 스스로 고장 판정을 내리고도 그 사실을 담담하게 인정할 수 있음이 놀라웠다. 불안도 찾아들지 않았다. 왕녀는 그를 대항의 수단으로 삼을 이가 아니므로. 그는 그 기묘한 확신에 경악했다.
조슈아 레비턴스는 어리석게도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P
먼지가 차차 가라앉았다. 사위가 죽음으로 빼곡해 그저 고요했다.
남자는 한때 누군가의 보금자리였을 폐허 안에 걸터앉은 채 시간을 죽였다. 과열된 머리를 식히려면 고사양의 작업은 엄금이라 그의 시선은 물고기처럼 허공을 유영했다. 문득 붉은 스커트에 걸려 넘어진다. 멍하니 붙박았다. 그가 명령을 어기고 하극상을 벌여 데려온 여자는 그를 볼 생각도 하지 않는 듯했다. 잔해에 기댄 바이올린 그림자가 애처롭다.
아마도 오늘이 정말 마지막 날인가 보다고 그는 느릿느릿하게 생각했다.
다 죽었으니까. 왕녀와 저를 제외하면. 그리고 그들도 곧.
부득부득 남아 시체더러 들으라고 연주하던 미련한 사람을 들쳐 안고 뛴 것은 그였다. 고집 뒤에는 분노를, 명령 뒤로는 원망도 받아냈다. 그녀와 얼굴을 맞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만큼은. 그 실랑이가 잦아들고는 겨우 사각지대로 숨어 빠져나올 수 있었다. 왕녀가 무섭도록 차분하게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문득 조슈아 레비턴스는 뻔뻔스럽게도 궁금해졌다. 후퇴하는, 또는 도망치는 상황에 몇 번이고 부닥쳤을 바네사의 속이.
거의 붙어 앉아 있는 여자는 무릎을 세워 감싸 안고 웅크려 있었다. 왕녀의 그림자가 그의 손끝에 걸렸다. 공연히 손을 거두었다. 적막은 쐐기풀로 짠 담요처럼 깔렸다. 곧 그는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려 자세를 잡았다.
아직 잦아들지 않은 전투의 여운 탓에 예민하게 곤두세운 감각이 여전했다. 처음에는 착각이라고 여겼다. 흐느끼는 울음소리에 눈을 떴다. 잘게 떨리는 어깨, 불규칙하게 오르내리는 등이 먼저였고 바닥을 쏘아보는 물먹은 눈이 종결이었다. 손끝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녀가 우는 모습은 꿈에서라도 본 일이 없다. 감히 어떻게 생각하나. 누가 하늘이 무너지기를 꿈꿀까.
아주 오랫동안 그녀는 태산처럼 버티고 있었다. 그에게 4왕녀의 추락은 아주 막연하고 멀어서, 예상해 본 일도 없었다. 그러나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 역시 사람이니만큼 분노하면서 슬퍼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울음으로 감정을 표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당연한 진리를 의식했어야 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혈색 도는 뺨 위로 눈물이 길을 낼 때마다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의 기분이 점점 깊어졌다.
제국보다도 강대한 적이 아닌, 그녀의 사람들을 지킬 수 없는 현실이 여자를 절망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손을 뻗었다.
대책 없이 내민 손끝이 젖어 들었다. 달아오른 눈가의 온도가 뜨겁다. 그 열기가 말단부터 불꽃을 피워냈다. 순식간에 옮겨와 타오르고, 이대로 살라먹히지는 않을까 두려움이 숨통을 틀어막을 때. 도도한 강물같이 그에게로 흘러온 시선은 놀란 기색 없이 그저 정연했다. 그 눈동자가 수레바퀴처럼 서서히 굴러오는 아주 잠깐은 곧 억겁이 되었다.
그건 어느 전설이나 서사시에 빗대기에는 아주 작고 사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어떤 예언보다 선고에 가까워서 직감이 눈을 돌리라고 경종을 울려 대도 소용없었다. 일단 눈이 마주치고 나면, 더럭 겁이 치밀어 피하고 싶어도 단단히 얽혀 먼저 끊어낼 수 없다.
귓가를 두드려 대던 심장 소리가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대신 불규칙한 숨소리, 흔들리는 어깨를 따라 바스락거리는 마찰음 따위가 잡혔다. 역광에 그늘진 눈두덩, 저들끼리 엉겨붙은 젖은 속눈썹에 주의를 빼앗겼다. 남자는 뒤늦게 인과를 짐작하고 짚어냈다.
가령 왜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같은 것을.
머리가 지끈거렸다. 육체의 고통과는 별개로 의식은 놀랍도록 또렷했다.
미치광이처럼 왕녀의 뺨을 반복적으로 쓸었다. 눈에 가득 여자를 담고 아랫속눈썹에 맺혔다가 스쳐 가는 눈물을 훔쳐냈다.
귓가에 환희의 송가가 들려오지도,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지도, 충만한 감정이 흘러넘쳐 벅차지도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고, 황폐한 땅에서 피어오른 먼지는 가시거리를 줄였으며 그의 입에서는 차마 한 음절의 약속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함께 정한 언어보다도 분명한 표현이 존재했다.
어쩌면 잠시간은 경계를 내리고 있었을 여자는 천천히 눈물샘을 말렸다.
그에게는 익숙한 얼굴이다. 입술은 일자로 단단히 사리물고 눈가는 그늘이 드리워진다. 그녀는 제련된 칼날 혹은 심판자의 천칭으로 화했다. 무겁게 떨어졌다. 끝은 분이 어려 떨렸다.
“당신.”
왕녀는 그를 시선으로 꿰어 죽였다. 쏘아 죽이고 매달아 죽였다. 특임대장은 기꺼이 덫에 숨통을 죄였다. 백 마디의 말보다 무거운 단어에 깔려 죽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리고 분명하게 얼굴을 감싼 남자의 손을 떼어냈다. 강하게 쳐내지 않았는데 얼얼했다. 하필이면 바이올린 현을 따라 베인 왼손을 내밀어 남자의 손목을 쥐고 밀어냈기에 팔뚝을 따라 짧게 붉은 선이 그어졌다. 그 흐름의 내내 남자의 눈을 직시하면서였다.
선명한 거부가 그어진 뒤 그는 물기 어린 손을 쥐었다 폈다.
여전히 조슈아 레비턴스는 자신이 무엇을 기대했는지 알지 못했다.
